예술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들의 막역한 친구이자 영감의 원천, 때론 진정한 후원자가 되어준 존재가 있다. 고흐의 광기어린 화폭을 이해하고 최소한의 작업동력을 얻을 수 있도록 오랜 시간 후원한 동생 테오처럼, 화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한 이들의 존재는 셀 수 없는 명작을 탄생시킨 또 다른 주체이기도 하다.
특히 예술가의 화폭 가장 근접한 지점을 지켜온 '뮤즈'의 존재는 화가의 삶과 예술적 영감을 이끄는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역사 속 수많은 예술가에게 뮤즈가 존재했고, 이들과 얽힌 사랑과 고독, 괴로움, 분노, 성애, 환희, 쾌락의 감정은 끝내 화폭의 주인공이 되곤 했다.
◆폴락·모딜리아니의 뮤즈였던 그녀들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수장 잭슨 폴락의 곁에도 헌신적으로 폴락을 내조한 아내 리 크레이즈너가 있었다. 크레이즈너의 꿈은 화가였지만, 여류화가에 대한 인식이 곱지 않았던 시대적 배경에서 그림을 그리다 폴락을 만나게 됐고 폴락의 천재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크레이즈너는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화가의 꿈을 남편 폴락에게 투영하곤 했다. 술에 젖어 살던 가난한 화가였던 폴락의 다듬어지지 않은 삶에 들어간 크레이즈너는 곧 한 화가를 성장시키기 위한 고된 내조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데, 크레이즈너는 폴락이 작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독려하고 폴락의 매니저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폴락의 그림이 세상에 알려지며 찾아온 급격한 부와 명예는 화가의 정신마저 황폐하게 만들었다. 폴락은 자신의 창작 에너지를 채찍질하며 숨통을 옥죄었던 여자에게서 벗어나 안온한 여성의 품을 즐기고자 했고, 크레이즈너는 폴락을 떠나며 이들은 예정된 파국을 맞게 된다. 후에 폴락은 크레이즈너의 헌신적 사랑이 없었으면 자신도 없었음을 인정해야 했고, 결국 음주운전으로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
우수에 찬 여인의 작품들로 잘 알려진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역시 잔느 에뷔트린 없이는 이야기 할 수 없을 만큼 잔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가난한 화가였던 모딜리아니는 잔느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14살 어린 미술학도였던 잔느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가난과 술에 젖어 살던 모딜리아니의 남루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잔느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모딜리아니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내조했고, 그렇게 모디에게 잔느는 화폭의 익숙한 모델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이며 영감의 원천이 됐다.
그러나 모디는 술과 마약에 젖은 방탕한 생활을 쉽게 정리하지 못했고, 서른 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8개월 된 모디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던 잔느는 이튿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영원한 모디의 뮤즈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결국 잔느의 사랑은 이후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갈라를 사랑한 달리, 카미유를 버린 로뎅
초현실주의적 화면으로 시대에 각인된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곁에는 10살 연상의 여인 갈라 엘뤼아르가 있었다. 달리를 만났을 때 갈라는 이미 남편과 자식이 있었고 부적절한 관계를 지속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남성편력의 소유자였지만, 이채롭게도 갈라는 무명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탄생시키게 하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살바도르 달리뿐 아니라 시인 폴 엘뤼아르, 화가 막스 에른스트 등이 뮤즈 갈라로 부터 영감을 받았다.
갈라가 남편과 딸을 버리고 10살 어린 달리와 교제했을 무렵 세상은 둘의 관계가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며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갈라를 향한 달리의 사랑은 특별했다. 갈라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달리는 그녀의 지성을 찬미했다. 그녀는 달리의 화폭 속에 마리아로 표현될 정도로 달리의 온 정신을 지배했다.
달리는 자신의 작품에 '갈라와 살바도르 달리'라고 서명할 만큼 자신의 광기가 갈라라는 '성녀'로부터 구원받는다고 느꼈다. 달리가 그림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기 전부터 갈라는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달리의 예민한 정신병적 기질을 예술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작가로서 더 비약할 수 있도록 관리했다. 갈라가 전부였던 달리, 도덕적인 잣대로 가늠하기 어려운 이들의 사랑은 화가와 뮤즈의 신화로 남아있다.
비극적인 뮤즈의 신화로 널리 알려진 카미유 클로델 역시 로뎅의 영감이 되는 뮤즈였다. 로뎅은 카미유의 번뜩이는 재능을 사랑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명성을 빼앗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녀를 시기했다.
카미유의 애타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로뎅은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고, 자신의 여러 작품들을 카미유의 손을 거치게 하는 등 그녀의 재능을 이용하기도 했다. 카미유는 로뎅의 예술적 영감을 자극시키고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뮤즈로서 로뎅에게 열정을 다했지만, 로뎅은 자신의 조강지처 로즈뵈레에게 돌아가버린다. 결국 로뎅에 대한 애증으로 몸서리치던 카미유는 창작의 에너지가 거세된 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여년을 정신병원에 수감돼 보내는 비극을 맞았다.
감정의 영역에 쉽게 타오르고, 상처받고, 흔들리는 것 또한 범인이 아닌 예술가로 태어난 화가의 숙명일 것이다. 때론 명작을 탄생시킨 영감의 원천으로, 때론 꾸준히 작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독려하고 내조하는 오랜 후원자의 모습으로 존재해 온 '뮤즈'는 화가의 일부가 아닌, 주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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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8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예술가의 으뜸 후원자 '뮤즈'
자본과 손잡은 예술, 그리고 컬렉터 ⑨폴락·모딜리아니의 아내들
김지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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