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은 내 운명
그의 어릴 적 꿈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냥 교사도 아니고 교육환경이 열악한 오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그의 소망이었다. 하지만 꿈을 향한 길은 험난했다.
“어릴 적 ‘상록수’·‘섬’이라는 책을 읽고 교사의 꿈을 키웠지만 대학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데다 큰 교통사고를 당해 꿈을 접었어요.”
악재가 겹쳐 교사의 꿈을 접은 그는 지인의 권유로 교정직 공무원 시험을 봐 합격했고 교도소에서 일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2년 동안 근무했지만 그는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했다. 그래서 다른 직업을 찾다 철도 공무원으로 이직해 2년간 일했지만 역시 만족감을 얻지 못했다.
“두번의 이직을 통해 제 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했고 그렇게 선택한 게 소방관이었죠. 틈틈이 공부를 해서 소방관 시험에 합격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는 1983년 9월부터 2014년 6월까지 31년간 서울 용산·관악·구로소방서 등에서 일했다. 숱한 사건·사고를 겪으며 지칠 만도 했지만 그는 항상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오로지 ‘국민안전’에만 몰두했다.
퇴임 후에는 민간 안전교육 강연에 나섰지만 그렇다고 대충하는 법이 없다.
“대충은 없어요. 할 때 확실히 해야죠. 사람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체험형 교육’의 중요성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난 건 몇달 전 민방위교육장에서였다. 화재·응급처지 교육을 위해 강단에 선 그는 300여명이 넘는 민방위 교육생 앞에서 재밌는 농담을 섞어가며 이목을 끌었다. 지루함에 몸서리치던 교육생들은 그의 재치 섞인 강연에 집중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랬던 그의 눈빛은 심폐소생술 실습교육에 들어가자 바뀌었다. 인자한 동네 아저씨 눈빛으로 교육생과 농담을 주고받던 그는 단호한 말투로 교육생의 진중한 실습태도를 이끌었다.
기자가 물었다. “그때 갑자기 눈빛이 변해서 놀랐어요. 실습에 더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그는 “이론은 그때뿐이죠. 한번을 해도 집중해서 체험해야 몸에 익어요”라고 강조했다.
체험형 안전교육을 강조하는 그는 사비를 털어 교육 장비를 산다. 백마디 말보다 한번의 제대로 된 체험형 안전교육이 실습생의 교육효과를 끌어 올린다는 소신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험형 안전교육의 중요성을 간과한다고 우려한다.
그는 사진 찍기만 바쁜 국민들의 안전교육 태도에 씁쓸해 한다. 그래서 아무리 강연료를 많이 줘도 체험형 안전교육이 보장되지 않으면 강연을 거부한다. 또 체험형 안전교육이 널리 퍼지길 바라며 동료 선후배 강사들을 끊임없이 설득하고 독려한다. 체험형 안전교육은 추억이 아니라 국민안전의 씨앗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내가 안전해야 국민이 안전하다”
31년 동안 누구보다 투철한 소방공무원으로 살았던 그지만 가족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소방관으로 살면서 휴가를 거의 못 갔어요. 스스로 100점짜리 소방관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진 못한 것 같아 항상 가족들에게 미안해요.”
소방관 ‘노철재’에 대한 자부심과 서운함이 공존했던 그의 세 자녀 중 둘째 아들은 현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방공무원의 길을 걷고 막내딸도 대학에서 소방방재학과에 다닌다. 위험한 직업이기에 자신의 길을 따라 걷는 걸 반대할 만도 하지만 그는 오히려 뿌듯하다고 말한다.
“제가 걸었던 길을 걷는 게 아빠의 삶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뜻이란 생각에 오히려 뿌듯했어요.”
그의 뒤에는 두 자녀뿐만 아니라 수많은 소방관 후배들이 국민안전을 위해 불철주야 땀을 흘린다. 그는 그런 후배들을 보면 뿌듯하지만 안타까운 마음도 크다.
“열악한 소방 장비는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인력은 아직도 충분치 않고 복지도 열악합니다. 소방인력 확충을 위해 정부가 더 힘썼으면 해요.”
마지막으로 그는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는다.
“후배들이 어려운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친절한 안전파수꾼이 됐으면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안전해야 국민도 안전하다는 걸 잊지 말고 항상 스스로를 독려하며 현장의 고충과 두려움을 극복했으면 해요.”
☞ 본 기사는 <머니S> 제554호(2018년 8월22~2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존중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 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