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진 작가
직장에 다니지 않는 프리랜서라도 주말은 주중과 달리 보내고 싶다. 대체로 반복되는 일상을 조금은 변주하고 싶은 욕심이랄까? 모처럼 교외로 나가 꽤 유명한 음악감상실을 찾았다. 음악이야 집에서도, 길 위에서도 늘 함께할 만큼 좋아하지만 층고 높은 전용 공간에서 오직 그것에 취해보는 기분은 분명 색다르다. 클래식과 재즈 선율에 푹 빠졌고, 행복해졌다. 잠시 의자에서 일어나 어슬렁대다가 벽면 한쪽에 걸린 사진 앞에 섰다. 루이 암스트롱. 재즈 거장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었다. 액자 속 사진 옆엔 그가 남긴 다음 말이 함께 적혀 있었고. "당신이 만약 재즈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Man, If you have to ask what jazz is, you'll never know.)
읽으면서 소설 속 문장이 떠올랐다.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에서 자유롭고 열정적인 주인공 니나가 했던 말.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 의미를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거예요. 그것을 묻지 않는 자만이 해답을 알아요." 이 말을 거의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책을 읽던 당시에 내가 정말 인생의 의미를 궁금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 40대로 진입한 나는 어쩌면 인생이 생각만큼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살아온 시간은 늘어났지만 기대만큼 이루진 못했다는 좌절감과 허탈감 탓이었을까. '삶의 한가운데'라는 제목이 좋아서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친구한테 선물했던 10대 때는 그 허세 만큼이나 인생을 거창하게 여겼었다. 중요한 의미들로 가득한 무엇으로 말이다.

"재즈가 뭔지 묻는다면 재즈를 알 수 없을 것"이란 말을 보고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면 그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란 말을 떠올린 건 둘이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재즈도, 인생도 '왜' 보다는 '어떻게'에 관한 문제라는 해석으로 읽혔다. 재즈에선 연주자가 본연의 즉흥성과 감정, 창의성을 발휘한다. 같은 곡도 저마다 다르게 변주할 수 있다는 게 재즈의 본질이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특정한 무엇으로 정의할 수가 없다. 대신 어떻게 연주하고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태어나서 소멸하는 생의 본질은 누구에게나 같다. 다만 삶과 죽음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풀이하는 방식과 해법이 서로 달라서 서로 다른 인생이 된다. 의미를 묻는 건 '왜'를 묻는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느냐고 생의 본질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러면 인간은 무력해진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인생은 '왜 살아야 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다.


"정작 인생에는 한 가지 계산서도 없고 아무런 결말도 없는데 말이야…….죽음도 겉보기만 그렇지결말이 아니고……생은 계속 흘러가는 거야" 역시 소설 속 니나의 말이다. 기억하는 까닭은 좋아하는 제목 '삶의 한가운데'가 저 문장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짐작했기 때문이다. 결말 없이 계속 흐르는 게 생이라니. 생은 정해진 무엇이 아니니 끝도 없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본다. 끝이 없다면 우리는 늘 생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소년도, 청년도, 노년도 모두 생의 한 가운데. 그렇다면 오늘도 같은 일상을 보다 경쾌하게 변주할 수 있기를 바라자. 어떻게 연주할지를 고민하다 보면 뜻밖의 의미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조민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