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지방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계기로 선거관리위원회 개혁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사진은 이재명 대통령이 8일 청와대에서 열린 4부 요인 회동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6·3 지방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계기로 선거관리위원회 개혁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선거관리의 독립성은 보장하되 비상근 위원장 체제와 폐쇄적인 사무처 인사 구조, 취약한 내부 통제 장치는 손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와 여야도 사태 원인 규명과 제도 개선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어 선관위 개혁 논의는 국회 차원의 입법 과제로 옮겨붙을 전망이다.
9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은 8일 청와대에서 조정식 국회의장, 조희대 대법원장, 김상환 헌법재판소장, 김민석 국무총리 등 국가 4부 요인과 만나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논의하고 국회 차원의 선거관리 개혁 방안 마련을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같은 날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도 이번 사태를 두고 "모범적인 민주국가를 순식간에 망가뜨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선관위 개혁의 방향을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한다. ▲비상근 위원장 중심의 느슨한 지휘 체계를 상근 책임 체계로 전환 ▲내부 승진 중심의 사무총장 인선 구조를 개방하고 비대해진 사무처 조직을 정비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선관위의 지위를 존중하되 회계검사와 외부위원 중심의 내부 감사 기능을 강화해 실질적 통제 장치 마련 등이다.


첫째, 비상근 위원장 체제 개편이다. 중앙선관위는 위원 9명 가운데 상임위원이 1명뿐이다. 중앙선관위원장은 관행적으로 현직 대법관이 맡아 왔다.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의 상징이라는 장점은 있지만 대법관 직무와 선관위원장 직무를 병행하는 구조에서는 전국 선거관리 조직을 상시적으로 지휘·감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동행미디어 시대'와의 통화에서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비상근직을 상근직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며 "중앙선관위의 경우 상임위원을 현행 1명에서 3명 안팎으로 늘리고 이 가운데 위원장을 맡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차 교수는 현직 대법관이 아닌 전직 대법관 중 영리활동, 특히 대형 로펌 활동을 하지 않은 인사를 상임위원장으로 임명하는 방식이 적절하다고 봤다.

시·도 및 구·시·군 선거관리위원장을 현직 법관이 비상근으로 맡아 온 관행도 개혁 대상으로 거론된다. 선거관리위원장을 지낸 한 현직 부장판사는 시대와의 통화에서 "판사가 선관위원장을 맡더라도 실제 선거관리 실무를 직접 지휘하는 구조는 아니다"라며 "사무처 직원들이 실무를 담당하고 위원장은 선거 당일 보고를 받고 확인·공표하는 역할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는 "위원장이 명목상·상징적 책임자에 머무는 측면이 있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6·3 지방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계기로 헌법학계에서는 선거관리의 독립성은 보장하되 비상근 위원장 체제와 폐쇄적인 사무처 인사 구조, 취약한 내부 통제 장치를 함께 손봐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사진은 9일 오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걸린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 /사진=뉴스1
둘째, 사무처 조직의 폐쇄성을 완화하고 책임성을 높이는 것도 과제로 꼽힌다. 선거관리는 업무 특수성이 강해 일반 행정기관처럼 순환보직이나 기관 간 교류로 폐쇄성을 낮추기 어렵다. 이 때문에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 인선의 개방성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동안 사무총장 인선이 내부 승진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조직 폐쇄성과 내부 감싸기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차 교수는 "사무총장을 내부 승진으로 임명하는 것은 직원 사기 진작이나 조직 효율성 측면에서 장점이 있다"면서도 "현재 상황에서는 외부 인사도 임명할 수 있도록 문호를 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무총장과 상임위원이 결탁하면서 선관위 조직이 매너리즘에 빠지고 나태하게 운영돼 온 문제가 누적돼 터진 것 아닌가 싶다"며 "함께 인사·채용 비리와 선거철 휴직 문제 등을 막기 위한 법령 정비도 필요하다"고 했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선관위 조직을 축소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시대에 "한국처럼 선관위 소속 공무원이 많은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며 "평시에는 업무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데도 조직이 3000명 가까이 확대되면서 느슨하고 무능한 조직으로 변한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셋째, 감사 체계 개편도 쟁점이다. 선관위는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사전투표율이 높고 지방선거에 대한 관심이 대선·총선보다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 남는 투표용지가 부정선거 주장 단체에 흘러 들어갈 가능성, 예산 낭비 논란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선관위가 당초 전체 유권자의 110% 수준으로 투표용지를 인쇄하겠다며 예산을 확보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앞서 인사·채용비리와 선거철 휴직 문제 등도 불거졌던 만큼 선관위에 대한 외부 감사 요구도 커지고 있다.

다만 감사원 직무감찰을 확대하는 방식은 헌법상 한계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감사원의 선관위 채용 등 인력관리 직무감찰이 선관위의 독립적 업무수행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감사원이 대통령 소속 기관인 만큼 독립 헌법기관인 선관위를 직무감찰 대상으로 삼을 경우 선관위를 행정부 소속 기관처럼 다루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취지다.

대안으로는 감사원의 회계감사를 강화하되 선관위 내부 감사기구를 외부위원 중심으로 운영해 독립성과 실효성을 높이는 방안이 거론된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시대에 "감사원의 기본 기능은 회계감사와 직무감찰인데 회계감사는 모든 국가기관을 대상으로 할 수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서도 "직무감찰은 대통령 소속 감사원이 국회나 법원, 헌법재판소 등에 대해 할 수 없는 것처럼 선관위에 대해서도 어렵다"고 말했다.

중장기적으로는 감사원을 대통령 소속이 아닌 독립기구로 개편하는 개헌 과제도 논의할 수 있다. 장 교수는 "대통령 소속 감사원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며 "감사원을 독립기관으로 만든다면 중장기적으로는 직무감찰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