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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 인간은 자유인인가 노예인가? 근대국가가 탄생하면서 그전까지 사회의 근간을 마련했던 계급사회구조가 서서히 무너지고, 인간은 집단을 구성하는 한 일원이 아니라, 개인으로 탄생하였다. 현대사상의 근간은 개인이 도시이며 국가라는 인지다. 우리는 그런 사상을 '인권'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창세기>에서 신은 대중을 창조하지 않고 유일한 한 사람 '아담'을 창조했다고 기록한다. '아담'은 개인이자 인류다. 탈무드는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온 세상, 더 나아가 온 우주를 구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도시와 도시문화가 생기면서 개인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전락해 버린다. 전체를 위한 일부가 되었다. 사실 일부가 없는 전체란 존재할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인간은 도시 안에서 기능하는 동물이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문구 '쪼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은 근대를 넘어 현대에서 인간의 체념적이며 부족한 자화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인간은 '도시'라는 사회의 일원으로 공공선을 위해 최선을 경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공동체는 '우연히' 속한 도시나 국가를 위한 애향심과 애국심이 발휘한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훈장을 주며 추켜세웠다.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은닉되어있는 양심은, 유일무이하게 독특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릴 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이다. 양심은 천재적인 음악가의 연주와 같다. 그(녀)의 혼신을 담은 연주를 듣는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마도 그 연주자가 그런 연주를 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수고에 감동했을 것이다. 혹은 최선의 연주가 관객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자신만의 천재성을 일깨워, 그들도 그런 삶을 시작하라고 격려했을 수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찾아 연마하여, 그 연습 과정을 무대 위에서 의연하게 표현하는 자가 천재적인 연주자다. 그의 천재성은 지극히 사적이지만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기에 보편적이다.
현대사회는, 인터넷과 SNS로 제공되는 수많은 편리가 만들어낸 정신이 없는 놀이동산이다. 그 사회는 개인의 개별적인 취향에는 관심이 없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공동의 취향을 형성하길 바란다. 그 취향의 범위가 동일하고 광범위할수록, IT를 기반으로 한 기업들이 수익을 창출하고 국가는 대중에 동일한 정보를 주입시켜 그들을 쉽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이 원하는 것이 진리이며 정의라고 세뇌시킨다. 과연 평화롭고 번창하는 사회가, 국가나 도시와 같은 공동체가 제정한 법이나 규율에 의지하는가? 투표만이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의 행정에 불만을 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가?
역사가 시작된 이후, 학교와 주류 미디어는 해당 시대의 권력에 순종하는 훌륭한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조석변개하는 대중의 요구에 굴종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호흡기이기 때문이다. IT의 급격한 발전으로 획일화된 정보와 뉴스를 접하는 현대인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불복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복종'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가 아니라,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의 노예해방론자이자 여권운동가 자매인 사라 무어 그림케(1792-1873)와 동생 안젤리나 에밀리 그림케(1805-1879)는 <노예와 노예폐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시민사회 혹은 종교에 있어서 권력에 대한 맹종과 전례 없는 복종은 독재를 조장하는 교리다."
20세기는 그런 맹목적인 복종을 조장한 독재들이 야기한 비극으로 시작하였다. 구소련, 나치스 독일, 캄보디아, 중국, 북한과 같은 국가들의 문제는 반란이나 법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맹목적이며 절대적인 복종이다. 그 구성원들은 비도덕적이며 법에 복종하고 다수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구호 아래 소수 집단의 권력을 견고하게 다지는 명령을 절대적으로 수용한다.
이들 사회의 문제는 불복종이 아니라 복종이다. 인류는 근대까지 불복종으로 체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치스 전범들을 재판한 독일 남부의 도시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복종' 때문에 처벌받았다. 이 사건은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삶을 의미 있고 아름답게 영위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을 제시해주었다. 독일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1)이란 책에서 전범들이 나치스 정권에 절대복종한 평범한 얼굴을 가진 인간들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49년에 출간한 에서 이미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예견하였다. 자신이 곧 선이라는 망상에 도취되어 권력집중과 권력 유지가 지상과제인 집권당은 대중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 미디어를 통해 대중의 불안과 불만을 조성하고, 자신과 뜻이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그들의 사상을 제재한다.
전체주의 정치는 대중을 자신들의 의도에 복종하는 노예가 되기를 바란다. 그 정치는 대중 감시, 경찰 권력, 법체계를 통해 대중을 길들인다. 그런 중앙집권적인 전체적인 국가에서, 불복종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는 거룩한 용기다. 특히 요즘과 같이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면, 국가가 경제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대중을 더 효과적으로 구속할 수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예견한 것처럼, 그런 상황에서 대중에게 선은 '자유'가 아니라 '빵'이기 때문이다.
'불복종'은 그런 전체주의 독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처방전이 아니다. 대중이 이미, 국가 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한두 사람의 외로운 외침으로 끝나기에 십상이다. 불복종은 그런 전체주의 국가의 등장을 막는 선제적인 조치다. 대중의 이익을 앞세워 개인의 자유를 앗아가는 전체주의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개인들이 다양한 불복종의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 다양한 소리의 집합이 '시민 불복종'이다. 개인의 불복종은 양심선언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시민 불복종은 뜻을 함께하는 시민집단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불-순응 의지를 표출하는 것이다. 전체주의를 타도할 유일한 방법은 대규모 비폭력 저항뿐이다. 왜냐하면 전체주의는 항상 대중의 절대적인 동의에 기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현자들이 전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불복종이라는 사실을 이성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 생각을 공유하여 기꺼이 편함을 포기하고 불편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오히려 불만, 공포, 혼돈, 분노, 그리고 불확실만 가중될 것이다. 왜냐하면 논리는 한 번도 사람들의 갈등을 해소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나의 논리가 있고 당신은 당신만의 정연한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는 말을 이용한 논리로 더욱 멀어질 뿐이다.
말이나 논쟁보다 절실한 것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바로 자신의 양심에 따라 기꺼이 시민 불복종 운동을 위해,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헌신하는 개인이다. 한 개인이 보여준 본보기는 대중운동보다 강렬하며, 불특정 다수에게 감동을 주어,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만일 사람들이 누군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모든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고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을 본다면! 만일 그의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한다면! 아무도 불복종을 시작하는 첫 사람이 되려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뒤에 앉아 게으르게 기다리며 누군가 등장하여 자신들이 사는 사회를 구원하길 바랄 뿐이다. 그들은 인생이 순간이란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아둔한 인간들이다.
불복종의 시작은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에 가만히 앉아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찬란한 보화인 '양심'의 소리를 경청하는 데 있다. 불복종은 자유를 보장하는 진정한 기반이며 복종은 노예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나의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유와 수련을 시작할 것인가? 그 양심이 일깨워주는 불복종의 선율을 삶을 통해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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