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강제추행 피해 사실을 신고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이모 공군 중사의 영정이 경기도 성남 소재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현실에 놓여 있다. 2021.6.2/뉴스1 © News1 김정근 기자

(서울=뉴스1) 김정근 기자 = 성추행 피해를 호소한 공군 부사관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배경엔 최악의 'n차 가해'가 있었단 관측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n차 가해가 일부 부사관들의 잘못된 문화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부사관들은 통상 한 부대에서 장기 복무하는 경우가 많아 상급 부사관의 부조리한 요구를 쉽게 거절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군을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복무를 시작한 만큼 앞으로 계속 마주할 상급자에 미운털이 박히지 않기 위해 하급자로서는 참고 견뎌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부하 부사관에 회식 강요…성추행 전 시작된 '0차 가해'

지난달 22일 숨진 이모 중사의 비극은 3월2일 저녁 회식 자리에서 시작됐다. 이 중사는 회식이 끝난 후 장모 중사와 함께 차량을 타고 돌아오던 중 강제추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사가 회식 자리에 참석한 시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조치로 인해 군내 회식 자체가 금지돼 있던 때다. 유족들은 이 중사가 방역수칙을 어기면서까지 회식 자리에 참여한 건 상급자의 강요를 떨쳐내지 못해서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당시 회식은 업무와 무관한 자리였던 것으로 드러나 비난이 커지고 있다. 같은 부대 상급자였던 노모 상사는 지인의 개업을 맞아 회식 자리를 마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들은 이 중사가 1년 전쯤 회식 자리에서도 다른 부사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는 눈이 적은 부대 바깥에서 벌어지는 회식 자리가 성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로 군내 성범죄 피해 여군들의 증언엔 술집 등의 회식 자리가 자주 등장한다. 직접적인 신체 접촉은 없었더라도 술자리에서 으레 나올 수 있다고 여겨지는 성희롱성 농담에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는 증언도 적지 않다.


◇정년퇴직 바라는 상급 부사관…'무사안일주의'가 화 키웠다.

이 중사는 장 중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곧바로 신고했다. 그러나 상급 부사관들은 "없던 일로 하면 안 되겠느냐"라며 합의를 종용하고, "살면서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식으로 회유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상급 부사관들은 별다른 사고만 생기지 않는다면 정년퇴직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성범죄 신고는 눈엣가시로 받아들이고 회유와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성범죄는 부상·사망 등과 같이 눈에 보이는 문제가 아니다. 당사자들 간의 합의만 이뤄지면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는 사안인 만큼 내부에서 문제를 덮으려는 시도까지 이뤄질 수 있다.

결국 잘못을 저지르거나 보고받고도 '없던 일'로 넘어가려는 상급 부사관들의 '무사안일주의'가 화를 키운 것이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과 김숙경 군성폭력상담소장이 2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군 내 성폭력 사건을 추가 폭로하며 구속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2021.6.2/뉴스1 © News1 구윤성 기자

◇평생직장이 걸린 일…부대 전체가 '2차 가해' 가담

이 중사가 전출 전후 부대에서 '2차 가해'를 당했단 의혹도 이 같은 군내 분위기와 연관된다. 같은 부대 간부들도 상급 부사관의 눈치를 보며 이 중사를 멀리했다면 이 자체가 추가 가해로 풀이될 수 있다.

방혜린 군인권센터 상담팀장은 "이번 사태의 문제는 가해자에게만 있지 않다"며 "피해자가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도 '너만 당하는 일도 아니다'라는 식의 무시가 있었기에 문제가 커졌다"고 지적했다.

물론 상급자가 사건을 덮으려 하는 상황 속 피해자와 함께 싸워줄 동료 부사관을 기대하기 쉽지 않은 게 군의 현실이다. 동료 부사관들의 입장에서도 직업이 걸린 문제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 부사관의 경우 군 복무를 오래 지속할 계획을 세우는 인원의 비중이 크다. 남성들은 의무복무를 대체할 겸 부사관을 택하기도 하지만, 의무복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여성이 군을 선택했을 땐 나름의 각오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군내 여성 성범죄 근절을 위해 여군의 숫자가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평생직장을 꿈꾸고 군에 입대한 여성들이 직업을 포기하면서까지 본인의 의사를 자유롭게 개진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만일 이 중사의 신고에 상급 부사관들이 사건을 덮으려 하지 않고 동료 간부들도 피해 호소에 힘을 실어줬더라면, 이 중사는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우리 영공을 지키는 '국가의 딸'로 서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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