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송 신임 한국은행 총재가 21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전환기에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합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21일 공식 취임하며 향후 4년간 통화정책의 방향성과 역할 재정립에 나섰다.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와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 등 복합 위기 속에서 물가 안정과 금융시장 안정 간 균형을 재설정하는 한편 원화 국제화와 지급결제 혁신, 구조개혁 대응까지 아우르는 확장된 중앙은행의 상을 제시했다. 전임 이창용 총재가 남긴 구조개혁 과제와 정책 한계 인식까지 이어받은 신 총재는 통화정책의 역할과 경계를 다시 설정해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다.

[First Message: 취임 일성은…]

신 총재는 이날 취임사를 통해 우리 경제가 대외 충격과 구조적 변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중동 갈등에 따른 국제유가 상승과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 등 단기 리스크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정학 갈등과 통상 질서 재편, 인공지능(AI) 확산 등 글로벌 경제 질서의 구조적 변화가 맞물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내적으로도 저출생·양극화·가계부채 등 누적된 구조적 문제가 성장 잠재력을 제약하고 있다고 짚었다.

이 같은 환경에서 중앙은행의 역할 역시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신 총재는 중앙은행을 고정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 아닌 경제 환경 변화에 따라 책무를 확장해 온 '진화하는 조직'으로 규정했다. 그는 "중앙은행의 변천은 정립된 이론을 뒤따른 결과가 아니라, 경험이 이론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었다"며 "우리가 마주한 도전 또한 실천을 통해 해답을 찾고 새로운 이론을 써 내려가야 할 과제"라고 짚었다.


이 같은 기조는 이창용 전 총재가 이임사에서 남긴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이 전 총재는 "통화·재정정책만으로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이루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정책 수단의 한계를 지적했다. 실제 외환시장에서도 내국인 해외투자 확대와 연금·조세·노동시장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금리나 외환당국 개입만으로 환율을 관리하기 어려운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Key Tasks: '확장된 중앙은행'…4대 과제 시험대]

신 총재는 향후 과제로 ▲신중하고 유연한 통화정책 운영 ▲새로운 금융안정 체계 구축 ▲원화 국제화 및 디지털화폐(CBDC) 혁신 ▲구조개혁 연구 및 정책 제언 등으로 제시했다.

통화정책은 불확실성이 확대된 환경을 고려해 '신중함'과 '유연성'에 방점이 찍힐 전망이다. 중동발 공급 충격으로 물가와 성장 경로의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함께 달성하기 위한 균형적 접근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이다. 이를 위해 정책 수단을 재점검하고, 정책 변수 간 상충 관계를 완화하는 한편 정부와의 공조를 강화해 나가겠다는 구상이다. 시장과의 양방향 소통을 통해 금리 경로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커뮤니케이션 전략도 병행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안정 정책 역시 기존 틀을 넘어서는 '확장'이 핵심 과제로 제시됐다. 은행과 비은행, 국내와 해외 간 경계가 흐려지고 자산시장과의 연계성이 강화되면서 금융시스템의 리스크 구조가 복잡해지고 있어 기존 건전성 지표뿐 아니라 시장 가격 지표를 활용한 조기경보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특히 비은행 부문에 대한 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부외거래와 비전통 금융상품까지 분석 범위를 확대해 금융안정 관리 체계를 재정비하겠다는 구상이다.

아울러 원화 국제화와 지급결제 혁신도 주요 축으로 제시됐다. 외환시장 24시간 개장과 역외 원화결제 시스템 구축 등을 통해 외환거래 인프라를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원화 기반 자본·실물 거래를 활성화하겠다는 목표다.


동시에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예금토큰 활용을 확대하고, 국제 협력을 통해 디지털 지급결제 환경에서도 원화의 위상을 높여 나가겠다는 전략이다. 원화 국제화, 지급결제 혁신, 거시건전성 정책을 연계한 '삼각 축' 체계를 구축해 정책 간 시너지를 도모하겠다는 점도 강조했다.

구조개혁 대응 역시 중앙은행의 주요 역할로 강조했다. 신 총재는 "경제구조가 달라지면서 경제현실과 경제주체들의 인식 사이에 괴리가 커질 경우 통화정책의 파급경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이런 점에서 구조적 요인이 통화정책과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통화정책 운영의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Focus : 내달 첫 금통위 데뷔전…물가·환율·성장 '삼중 변수']

신 총재의 데뷔 무대가 될 5월28일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에 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취임 직후 물가와 환율, 성장 둔화라는 복합 변수를 동시에 마주하게 되면서 첫 정책 판단이 향후 통화정책 방향을 가늠할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취임 직후 주요 경제지표가 잇따라 발표되면서 정책 판단의 부담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오는 22일 3월 생산자물가지수, 23일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속보치가 연이어 공개될 예정이다. 시장에서는 해당 지표들이 향후 물가와 경기 흐름을 가늠할 핵심 단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물가 상승 압력은 다시 확대되는 흐름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18.80(2020=100)으로 전년동기대비 2.2% 상승하며 상승폭이 전월(2.0%)보다 0.2%포인트 확대됐다. 중동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석유류 물가가 전년동기대비 9.9% 올랐으며, 2022년 10월(10.3%)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환율 역시 주요 변수로 꼽힌다. 미국과 이란 간 휴전 합의 영향으로 한때 1520원대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이날 전 거래일 종가보다 4.8원 내린 1472.4원에 출발하는 등 다소 진정된 모습이지만 여전히 높은 변동성을 보이며 불안 요인은 남아 있다.

성장 흐름도 녹록지 않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한국은행이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각각 1.9%, 2.0%로 소폭 상향 조정했지만, 중동발 공급망 충격으로 전망 경로엔 안개가 자욱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2.1%에서 1.7%로 내려 잡았고, 글로벌 투자은행(IB)들도 잇따라 전망치를 손질하고 있다.

물가 상방 압력과 경기 둔화 우려가 동시에 부각되는 환경 속에서 금통위의 정책 선택지는 더욱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리 인상과 인하 모두 부담이 큰 상황에서 정책 기조를 어떻게 설정하고 시장과의 소통을 이어갈지가 신 총재의 첫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신 총재는 "지금 우리 경제는 불확실성과 변화의 한가운데 서 있고 풀어야 할 과제들도 산적해 있다"며 "한은이 신뢰의 중심으로 그 역할을 다한다면 우리 경제가 처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