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훤히 보이지만 올라가려면 머리를 찧게 되는 유리천장(Glass Ceilling)은 흔히 여성의 승진상 신분 차별의 사례로 쓰인다. 미국 경제주간지 <월스트리트 저널>이 여성과 소수민족의 고위직 승진 차별에 대한 보이지 않는 장벽을 표현한 말이지만 전통적 유교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한국사회에서 오히려 더 잘 맞아 떨어진다.

여권 신장이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강력한 유리천장이 있는 국가 중 하나다. 최근 기업지배구조 평가기관인 GMI레이팅스가 발표한 '2012 이사회 여성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중국, 멕시코, 타이완, 인도, 러시아 등 10개 신흥국의 기업 이사회 내 여성비율 평가에서 꼴찌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국의 여성임원 비율은 1.9%로 선진국 평균(11.1%)은 물론이고 신흥국 평균인 7.2%와도 큰 격차를 보였다.


그런데 최근 유리천장이 대기업을 중심으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한번도 오르지 못했던 자리에 여성이 하나 둘씩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남성을 제치고 임원석에 앉은 여성임원을 살펴봤다.
 
◆그룹 최초, 새 역사 쓴 여성 임원

지난해 말 삼성그룹은 사상최대 규모의 임원 승진인사를 단행했다. 부사장 48명, 전무 127명, 상무 326명 등 총 501명이 소위 말하는 '별'을 달았다. 이중 유독 눈에 띄는 인사가 있었다. 삼성전자의 심수옥(50)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그룹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등 오너가를 제외하면 삼성그룹 최초로 부사장 자리에 오르는 여성이 된 것.


삼성전자 심수옥 부사장
 
심 부사장은 다국적 기업인 P&G에서 화장품 마케팅을 주도하다가 2006년 삼성전자로 이직한 뒤 글로벌마케팅 브랜드전략팀장,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마케팅 전무를 역임했다. 업계에서는 심 부사장의 승진에 대해 삼성전자의 브랜드 마케팅 역량을 강화시킨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삼성그룹에 비해 좀더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한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2012년 정기 임원인사에서 최초 기록이 나왔다. 첫 여성 전무다. 김혜경(49) 이노션 전무가 그 주인공으로, 현대차그룹의 '기프트 카' 캠페인을 널리 알리는 등 그룹 이미지 향상의 공로에 힘입어 지난해 전무로 승진했다. 현대차그룹은 "문화체육관광부 광고발전 유공자로 선정됐고 칸 광고제, 애드패스트 등 세계 주요 광고제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하며 우리나라 광고인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을 얻은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현대차그룹 김혜경 이노션 상무
지난 인사에서 현대차의 임원승진 대상자는 모두 465명이었지만 현대카드의 이미영(40) 이사와 함께 2명만이 여성 임원 승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현대차그룹의 여성임원은 4명으로 늘었다.



LG그룹 LG아트센터 윤여순 대표
LG그룹에서는 지난해 초 LG아트센터 신임대표가 된 윤여순(57) 전무가 여성 리더다.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교육공학 박사를 취득한 뒤 1995년 나이 40세에 LG인화원 부장으로 기업에 몸담은 사회 늦둥이다. 2000년 LG그룹 첫 여성 상무가 된 뒤 2009년 인사에서 역시 처음으로 여성으로서 전무 타이틀을 땄다.

효성그룹에서 처음으로 별을 단 이금정(43) 상무보도 주목할 만하다. 2011년 정기 임원인사에서 첫 여성 임원이 된 이 상무보는 중공업PG(Performance Group) 풍력사업단 전략기획팀장으로 풍력 등 신성장동력 사업을 발굴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포항공대 전자전기공학과 출신으로 카이스트 MBA 과정을 거쳐 효성에 입사한 전형적인 '공순이'다.
 

효성그룹 이금정 상무보

◆사막에 핀 꽃, 남초 기업의 여성 임원

여성임원 수가 조금씩 늘어가는 기업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여성의 임원 진출에 인색한 산업군도 상당하다. 속칭 '노가다'라 불리는 건설, 조선, 철강 등 중공업 분야는 여성임원 수를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애초에 여성 입사지원자가 적은 데다 현장 경험을 쌓기가 어려운 근무환경이 여성임원 배출을 어렵게 하는 요소다. 바꿔 말하면 여성임원의 존재가 더욱 빛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건설업계의 유일한 여성임원은 SK건설의 홍윤희 상무(51)다. 미국 허큘리스사에서 근무하다 SK케미칼로 스카우트된 뒤 기능성 폴리에스터 프라스틱 개발 등을 주도했다. 2008년 SK건설로 자리를 옮기면서 첫 건설업계 여성임원이 됐다. 당시 신설된 환경사업추진실의 초대 실장으로 현재까지 전사의 환경경영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건설사 공채 출신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여성은 GS건설의 이경숙(44) 상무보다. 1990년 LG엔지니어링(1999년 LG건설과 합병)으로 입사해 2010년 상무보가 됐다. 언론에서 이 상무보를 건설사 공채 출신 유일한 임원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그는 아직 임원이 아니다. GS건설의 인사정책에 따르면 상무부터 임원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강업계의 대표 그룹인 포스코에게 2010년은 의미 있는 해다. 42년 만에 첫 여성임원이 나왔기 때문이다. 글로벌 리더십 센터장을 맡고 있는 오인경(51) 상무가 주인공이다.

남초(男超) 기업으로 잘 알려진 포스코의 유리천장을 뚫은 오 상무는 정준양 포스코 회장이 전격 영입한 케이스다. 정 회장이 "포스코도 여성임원을 배출할 것"이라고 밝힌 후 9개월 만에 이뤄진 파격 인사다. 오 상무는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교육과정과 커리큘럼 개발을 주도하다 삼성그룹의 기업교육 전문기업인 크레듀 상무를 거쳐 포스코로 이동했다.

반면 조선업계는 여전히 여성임원을 찾을 수 없다. 현대중공업을 비롯해 대우조선해양, STX, 한진중공업, 삼성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등 주요 기업의 여성임원은 전무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