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인 것은 창발성(emergence)의 원천이다. 창발성은 이런저런 시행착오와 고뇌 끝에 창조적으로 우연히 발상이 일어나는 가능성이다.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이 대화를 나누다보면 우연한 관계에서 놀라운 상호작용이 일어나며, 그 상호작용의 결과 전대미문의 예기치 않은 창조의 스파크가 튄다. 과학적 발견도 우연히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숱한 고뇌와 실험 끝에 실패했지만 그 실패의 뒤안길에서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영감(serendipity)도 우연히 찾아온다. 그러나 우연이 영감을 맞이하려면 문제와 씨름하는 무수한 노고가 뒤따라야 한다.
우연은 계획 속에 있지 않다. 우연은 계획 밖에서 기다리다 우연히 마주칠 뿐이다. 삶은 우연한 마주침의 연속이다. 마주침으로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경이로운 신천지가 열리는 것이며 기대를 망가뜨리는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우연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고 우연으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라. 세상은 우연의 경연장이며 우연히 마주치는 꿈의 무대다. 꿈의 무대가 눈앞에 나타나면 그때부터 어떻게 춤을 출지 구상해도 늦지 않다.
물론 내가 앞으로 살아갈 꿈의 무대를 상상하는 것은 필요하다. 내가 상상하면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일찍부터 어떤 춤을 어떤 방법으로 출 것인지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계획하고 준비한다면 다른 멋진 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스스로 막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꿈속의 우연이 현실로 다가오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우연으로 하여금 삶을 이끌어가도록 우연과 함께 우연히 춤을 추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목적의식 없이 사는 사람을 한심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목적이 있어야 방향감을 잃지 않고 매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목적으로 바라보면 그 순간부터 목적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목적의식을 부여하면 그 목적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그 사람과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문이 닫혀버린다. 한가지 목적으로 사람과 사물을 보기 시작하면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다양한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우주에는 목적이 없다는 것, 그래서 모든 사물들을 목적으로 묶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목표중심의 효율적인 시간관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一喝)한다.
"바쁘게 목표달성을 추구하는 유형의 인간들이 수첩에 적어놓은 스케줄이란 모두가 그가 속해 있는 거대한 조직의 틀 속에 맞추어진 것들이지, 자신을 위해서 할애된 시간은 거의 없다. 나의 보람과 가치를 위한 목표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목적에 이끌려 내 시간을 관리하는 것인지 한번쯤 깊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세상은 목적이 아닌 우연의 여행이다. 우연의 물결을 타고 놀아라. 삶은 빛나는 우연에 의해 지배당한다. 저들은 아직도 나의 재난과 우연을 가엾게 여긴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우연과 함께 춤을 추다보면 우연히 영감이 다가온다. 그때 다가오는 영감을 믿고 그대로 행동하라! 그 길로 바로 걸어가기 시작하라. 그 길에도 물론 우연과 예측불허의 미래가 펼쳐진다. 그러나 우연은 사전에 예측할 수 없으며, 예측을 거부한다. 우연은 계획에 포함시킬 수 없으며, 계획당하기를 거부한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지는 게 삶이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기대를 저버리는 일도 있지만 ‘생각지도’ 못했는데 ‘생각의 지도’가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뜻밖'에서 ‘뜻’이 살아 움직인다. 모든 것을 ‘뜻안’에 가둬두고 완벽한 계획을 세워 철저하게 통제하고 조정한다면 삶은 재미가 없고 신이 나지 않으며 경이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만날 수 없다. ‘뜻밖에’ 일이 일어나야 ‘뜻’이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뜻’으로 하여금 이전과는 다르게 변신을 거듭하게 하려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내 ‘뜻’을 방목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뜻’이 또 다른 ‘뜻’을 만나 색다른 ‘뜻’의 세계로 질주할 것이다.
모든 것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통제하고 조정하며, 합리성이라는 잣대로 재단을 한다면 삶도 예술도 무미건조할 것이다. 예술가의 상상력이 우연의 하늘을 날고 있을 때 과학자의 논리와 합리성의 화살로 쏘아버리고 칼로 냉철하게 안 된다고 잘라버린다면 예술은 싹이 트기도 전에 고사(枯死)당할 것이다. 우연은 우연히 걸어가고 달려가며 날아간다. 우연의 꼬리를 잡아 달려 나가지 못하게 하고 우연의 머리를 잡아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우연은 웃을 것이며 우습게도 삶은 앞뒤가 꽉 막혀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을 것이다.
유영만
한양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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