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死後) 인터넷 공간에 떠돌아다니는 개인 정보를 내가 원하는 대로 정리할 수 있다면? 혹은 믿을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지인에게 '상속'해 줄 수 있다면 어떨까.
민감하고 지극히 사적인 정보들이 저장돼 있는 인터넷 공간에 '사후 관리 서비스'가 등장했다. 바로 구글의 '디지털 유언장' 서비스다.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가 전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자신의 데이터를 자동 삭제하거나 지정한 이에게 양도되도록 설정할 수 있게 한 것이 디지털 유언장의 핵심 내용.
전세계 4억2500만명(지메일 계정 보유자 기준)의 사용자를 보유하고 있는 구글의 이 서비스를 기점으로 국내 포털들의 사망자에 대한 디지털 유산 처리 정책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 것으로 전망된다.
◆'디지털 유언장' 뭐지?…'잊혀질 권리' 갖는 것
구글은 지난 11일 공식 블로그를 통해 휴면 계정 관리 서비스인 '인액티브 어카운트 매니저(Inactive Account Manager)', 일명 '디지털 유언장'를 발표했다.
이 서비스의 핵심은 사용자가 직접 본인의 데이터 처리 방법을 정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사용자가 본인의 계정을 휴면 계정으로 처리할지 여부와 처리 시점, 데이터 처리 방법 등을 결정할 수 있는 것. 여기에 휴면 사실을 알릴 대상을 미리 정할 수 있으며 휴면 계정에 남은 데이터는 완전 삭제하거나 가족·대리인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
특히 국가에 상관없이 구글 계정을 가지고 있는 사용자라면 누구나 '인액티브 어카운트 매니저'를 이용할 수 있다. 구글 계정 사용자가 전세계적으로 포진돼 있는 만큼 앞으로의 인터넷 이용 문화에 적잖은 변화가 예고되는 배경이다.
이 서비스는 또 온라인 공간에 존재하는 본인과 관련된 정보나 본인이 게재한 콘텐츠를 파기·삭제하도록 요청할 수 있는 권리인 '잊혀질 권리'가 하나의 서비스로 구체화 됐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럽연합의 '잊혀질 권리' 입법화 이후 나타난 변화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앞서 유럽연합은 지난해 1월 '잊혀질 권리'가 포함된 데이터보호법 개정안을 확정했다. 유럽연합 거주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터넷 사업자가 서버를 유럽연합 밖에 두고 있더라도 이 법의 적용을 받도록 한 것. 위반시에는 100만유로 또는 1년 매출의 2%를 벌금으로 내도록 했다.
유럽연합 집행부가 2014년 해당 개정안을 발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구글뿐 아니라 글로벌 인터넷 사업자들도 이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마련해 나갈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이러한 '잊혀질 권리'는 결코 나라밖 이야기만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이미 입법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 이노근 의원(새누리당)은 지난 2월 글을 올린 사용자가 포털 사이트 등에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삭제를 요청할 수 있고, 이를 요청받은 인터넷 서비스 업체는 확인 절차를 거쳐 즉시 삭제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저작권법 일부개정법률안과 정보통신망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구글의 움직임,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는 '잊혀질 권리' 입법화 논의에 따라 이제 국내 포털들도 변화의 압박을 보다 크게 느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국내 포털 "도입, 서두르지 않겠다"
구글의 변화에 NHN, 다음커뮤니케이션(이하 다음), SK커뮤니케이션즈(이하 SK컴즈) 등 국내 포털들의 반응은 어떨까. 변화의 필요성은 절감하나 서두르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NHN 관계자는 "구글 '디지털 유언장’ 서비스 같은 것을 고민해보겠다는 정도지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사항은 없다"며 "개인이 데이터에 대한 권한을 가지게 될 경우 기존에 사용하던 정보에 대한 다른 사용자들의 접근권이 제한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급박하게 해야할 사안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서비스 도입에 따른 여러 가지 리스크를 고려해 검토해 보자는 게 내부 분위기다"고 전했다.
본인 요청이 있을 때에만 데이터를 삭제할 수 있도록 한 다음 측은 망자의 디지털 콘텐츠를 유족에게 양도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다음 관계자는 "구글과 같은 형태가 될지, 어떤 형태가 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며 "다만 디지털 유산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망자의 디지털 유산을 유족에게 양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SK컴즈의 경우 "사망한 이용자의 미니홈피 비밀번호를 유족들이 가르쳐 달라고 했던 적이 여러번 있었다"며 "하지만 비공개 혹은 일촌공개 설정 역시 고인의 뜻이고 고인의 사생활이 존중돼야 하는 만큼 SK컴즈가 유족들에게 이용자 비밀번호를 공유한 적은 없었다. 망자의 비공개 콘텐츠의 공개 전환이나 열람은 불가능하다는 게 원칙이다"고 설명했다.
SK컴즈는 미니홈피에 대한 별도의 휴면 정책이 없고 메일이나 클럽 서비스의 경우 일정 기간이 지나면 휴면 상태로 전환하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국내에서는 유명 연예인의 자살 이후 미니홈피 관리 문제, 2010년 천안함 사건으로 사망한 장병들의 유족들이 장병 미니홈피나 이메일 계정 접근을 요청하면서 사망자의 디지털 유산 처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돼 왔으나 정보통신망법, 통신비밀보호법, 민법 등에 따라 인터넷 계정 사용 권리에 대한 제공이 제한되고 있다.
실제 정보통신망법 제49조는 정보통신망에 의해 처리·보관·전송되는 타인의 정보를 훼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으며 2007년 대법원 선고에 따르면 사망한 자는 타인에 포함된다.
또한 2005년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인터넷 계정정보는 가상 공간에서 행위자의 인격을 표상하는 개인정보며, 이는 주민등록 번호 또는 아이핀(i-PIN)과 대응된다는 점에서 상속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국내 포털업체 관계자는 "'디지털 유산' 처리에 대한 법률이 모호하고 정부기관의 가이드라인이 부재한 상황"이라며 "무엇보다 이와 관련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7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