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냉면 마니아들은 여름이 지난 지금이야말로 냉면을 먹을 때라고 한다. 한여름엔 너나없이 냉면집으로 몰려오는 통에 제대로 된 냉면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민의 사랑을 받았던 냉면이 요즘엔 무척 비싸졌다. 이른바 정통 평양냉면집에서는 양질의 냉면을 쾌적하게 즐길 수 있지만 가격 때문에 자주 가기 어렵다.
메이저리그가 있다면 마이너리그도 있는 법. 냉면 생각이 간절할 때 기대치를 조금 낮추면 문턱이 낮은 친숙한 서민냉면집들이 있다. 가격이 저렴하고 비교적 알려진 서울 시내 유명 서민냉면집을 찾아봤다.
서민냉면집은 그야말로 대중식당이다. 고급 서비스나 우아한 식사 환경을 기대해선 안 된다. 높은 냉면의 질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다. 그렇다면 가격이 싸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막상 서민냉면집을 다녀보니 명암은 있었다. 개성 만점의 냉면을 저렴한 값에 먹는다는 점은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낮은 가격을 감안하더라도 일부 업소는 냉면 수준이 명성에 못 미쳤다.
우선, 비슷한 가격대에 가격대비 품질의 차이가 천차만별이었다. 메이저급 냉면들과 견주어 손색없는 냉면도 있었지만 정말 딱 그 가격에 맞춤한 냉면도 적지 않았다. 몇 년 전만 해도 가격만 저렴했지 질에서 밀리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다소 아쉬운 생각이 든다.
서민냉면집 대부분 벽에 붙인 가격표의 천 단위 숫자를 새로 고쳐 쓴 자국이 보인다. 이 점은 다른 여러 서민냉면집에도 해당한다.
또한 냉면의 분량이 너무 적다. ‘서민냉면’집들은 냉면 양에 따라 보통(소)과 곱빼기(대) 두 가지로 낸다. 5000~7000원짜리 보통은 일반 성인이 먹기엔 양이 부족하다. 제대로 먹으려면 어차피 곱빼기를 시켜야 하는데 그러면 귀족냉면집 가격 수준에 육박한다.
기왕에 착한 가격을 고수하니 양까지 인심을 쓰라고 하는 건 마이너 리거들에겐 너무 야박한 주문일까?
◇ 40년 전통의 서민냉면, 맛은 조금 아쉬워
남대문시장 <부원면옥>
냉면 가격은 보통 6500원 곱빼기 8000원이다. 메밀 함량이 낮은 듯 면발이 미끄럽고 차지다. 육수를 마시면 감초나 당귀 씹은 것처럼 달고 쌉쌀한 맛이 뒷맛으로 살짝 남는다. 기름이 육수에 뜨는 점도 평양냉면 마니아들로서는 다소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불만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큼지막한 수육을 두 점씩이나 고명으로 얹어주는 것도 고맙다. 이례적으로 다진 생마늘을 고명과 함께 올렸는데, 그 양이 많지 않아 더위로 지친 입맛을 돌게 해준다. 점심시간에는 젊은 직장인 손님이 많고, 이들은 냉면을 기다리면서 빈대떡(4000원)을 먹는 풍경이 심심치 않다. (1, 3주 일요일 휴무)
◇ 팔순 노부부가 직접 뽑는 무난한 맛의 평양냉면
경동시장 <평양냉면>
전직 간호사 출신 할머니가 능숙한 솜씨로 냉면을 뽑아 말아냈다. 노년에도 자신의 일거리를 찾아서 부지런히 일하는 주인장 내외분 모습은 냉면 맛보다 감동적이었다. 계산대 밑에 놓인 바깥주인의 등산화는 청춘의 모습 그대로였다.
면발과 육수가 두루 무난한 편이었다. 이번에 소개한 냉면집 가운데 가장 평양냉면 맛에 가까웠다. 다만 살짝 잡내가 가볍게 나는 육수만 조금 더 보강한다면 메이저급 평양냉면들과 견줄 만하다.
껍질을 벗긴 오이를 정성껏 곱게 채 썰어 고명으로 올리고 배 한 조각도 올렸다. 그러나 보통이 7000원(곱빼기 1만원)이다. 서민냉면치고는 가격이 저렴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작은 수육 한 점도 아쉬웠다.
대신 보통 냉면집에서는 여간해서 주지 않는 김치가 푸짐하게 나왔다. 김치 맛이 너무 시어서 오히려 냉면 맛을 반감시켰다. 함께 내온 무김치도 신맛이 강하긴 마찬가지였다.
◇ 이태원 젊은이들 사랑 받는 저렴하고 매운 냉면
이태원 <동아냉면>
전통 평양냉면에서는 멀어져간 캐주얼한 냉면을 선보인다. 가격은 소(보통) 5000원, 대(곱빼기) 6000원인데 그릇이 너무 크고 그릇에 비해 소(보통)는 냉면의 양이 적은 편이다.
물냉면에도 매운 양념장을 올려준다.
오이채와 무채 등 다른 고명과 함께 양념을 비비고 섞어 먹는다. 양념장의 단맛과 매운맛이 워낙 강해 다른 맛을 압도한다. 마치 밀면이나 막국수 느낌이 난다. 고객 대부분이 20~30대 젊은 층이고 이태원이라는 지역성이 반영된 듯하다. 너무 매우면 뜨거운 육수로 매운 맛을 씻어내면서 먹는 게 좋다. 매장 한 쪽에 설치한 육수통에서 셀프로 육수를 따라 마실 수 있다.
◇ 육수 맛 아쉽지만 메밀향 구수한 면발은 좋아
탑골공원 옆 <선비옥>
춘천이 고향이 주인장이 청소년 시절부터 40여년 냉면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자리에서만 20년 넘게 냉면을 팔고 있다고 한다. 식당 입구 들머리에서 메밀 반죽을 하고 냉면틀에 면을 뽑아낸다.
평양냉면 스타일의 물냉면은 아직도 5000원의 가격을 고수한다.(카드로 지불할 경우 6000원) 냉면을 주문하면 별도의 나무젓가락과 고춧가루를 입힌 무김치를 내온다.
육수에 들어간 동치미 국물의 시큼한 맛이 너무 도드라졌다. 신맛이 처음엔 다소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방심하다가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다. 국물에 드문드문 뜬 기름과 가끔 혀끝에 잡히는 잡내도 냉면 맛에 대한 집중을 방해한다.
상대적으로 양호한 냉면 면발을 자꾸 튀는 육수가 점수를 깎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정도 먹으면 차츰 그 맛에도 익숙해진다. 정통 평양냉면 마니아일수록 적응 시간이 좀 더 길게 필요할 것 같다.
다소 짙은 색깔이었지만 적당히 메밀 향이 감도는 면발은 꽤 만족스러웠다. 비교적 두툼하게 썬 무와 오이 몇 쪽에 작지만 배 한 쪽도 고명으로 올라갔다. 수육도 섭섭지 않을 정도의 크기다. 종로에 위치한 탓인지 노년층 손님이 많은데 이들은 대부분 냉면에 소주 한 병씩을 곁들였다.
◇ 각얼음과 매운 맛으로 청량감 으뜸인 서민 냉면
동묘앞 <낙산냉면>
본래 낙산 쪽에서 수십 년 영업을 하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긴 오래된 냉면집이다. 현대식 건물이어서 비교적 깔끔하다. 동대문 지역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서민냉면집이다. 매운 냉면으로 소문난 집으로 보통은 6000원, 곱빼기는 8000원이다.
매운맛은 5단계인데 중간단계인 보통 매운맛은 생각보다 그리 맵지 않다. 맵기의 강도나 양념 맛 조절은 직원들에게 요청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육수에서 미약하게나마 한약재 냄새가 조금 느껴진다. 면발은 가늘고 질긴 전형적인 함흥냉면 면발을 닮았다. 입 속에서 치아로 면발을 끊으려면 몇 번 엎치락뒤치락해야 한다. 아마 전분이 많이 들어간 면인 듯하다.
가늘게 채 썬 오이와 참깨를 많이 넣고 여기에 각얼음을 띄워 시원함을 강조했다. 역시 오이채를 아삭아삭 씹을 때마다 청량감이 느껴진다. 냉면 자체의 시원함에 매운 맛을 먹고 난 뒤의 심리적 시원함까지 더해, 이 집 냉면이 여름철 냉면임을 절감하게 해준다. (1, 3주 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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