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봄입니다. 무성하게 팬 청보리 싹들과 연둣빛 물이 밴 버드나무 가지들이 흑백의 겨울 풍경을 한순간에 녹색의 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4월의 첫 일요일, 산책 겸 등반 겸 봄바람을 타고 집을 나설 때는 비가 올 듯했지만 개의치 않고 출발했습니다. 경기도 가평과 양평의 경계에 있는 통방산(650미터)은 서울 어느 곳에서 나서도 한 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입니다. 북한산처럼 지척거리이거나 아예 설악산처럼 작정을 하고 나서야 할 먼 산이 아니어서 일까요. 의외로 이곳은 찾는 이가 많지 않은 인적 드문 산입니다.
노문리 정곡사 입구서부터 제법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트레킹을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로 들어섰습니다. 맑은 날 트래킹은 시시 때때 변하는 하늘빛에 조응하는 주위 풍광을 온몸으로 감상할 수 있지만 이렇게 우중충한 날씨에 잔비가 내릴때는 감각이 자연히 발아래로 향하게 됩니다. 낙엽 사이로 매끈한 흙들이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습니다. 불과 한 달 전, 통방산은 낙엽 아래 얼음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굳은 흙 밑에 듬성듬성 얼음판이 깔려있고 그 위에 낙엽들이 얹혀 있어 씨앗의 발아를 막고 있었습니다. 이제 얼음은 자취를 감추고 치열하게 겨울을 이겨낸 씨앗들이 망울을 터트리고 있는 4월입니다.
코가 땅에 닿을 듯이 급한 오르막이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밧줄을 부여잡고 이십여분 넘게 오릅니다. 거칠어진 숨결로 이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이래서 산을 오를 때는 내려올 때만큼 사위를 관찰하기 어려운가 봅니다. 숨은 새나 꽃들은 산을 내려올 때 더 잘 보입니다.
거친 오르막이 끝나고 완만한 평지가 나타납니다. 숨을 고르고 둘러보니 곳곳에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있고 메말랐던 나뭇가지마다 푸른 기운이 깃들어 있습니다. 가지마다 여린 눈엽(嫩葉)이 피어난 지금이 눈이 시리도록 감동하게 되는 때입니다. 푸른빛이 한층 짙어진 소나무 아래에는 아기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 수북한 낙엽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습니다. 한겨울 얼음 아래에서 찬 기운을 견디어 낸 아기소나무의 여린 연녹색 잎에서 생명의 생기를 느낍니다. 한순간 '훅' 부는 바람과 같이 찰나에 스러지는 인간의 생과 달리 영원히 죽지않는 영생의 기(氣)를 4월의 아기소나무에서 느껴봅니다. 오늘과 같은 봄이 내년 또다시 올까요. 황사와 미세먼지 가득한 봄 같지 않은 봄이 오면 그 봄을 또 다른 내가 아닌 내가 맞이하고 있지 않을까요.
아래만 보며 걷다보니 지난밤 멧돼지 일가의 행적이 샅샅이 눈에 띕니다. 파헤쳐져서 드러난 흙에 찍힌 발자국들은 그들이 일가족임을 알려줍니다. 산속을 누비는 멧돼지 일가의 즐거움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유일할 터인데 종일 사람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으니 방해받지 않고 사냥과 놀이를 즐긴 듯합니다.
다만 멧돼지들에게는 이 자유로운 시간이 길게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통방산 산허리를 빙 둘러 골짝 골짝마다 펜션과 별장과 식당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또 들어설 자리의 택지조성 공사로 어지러워져 있습니다. 이런 곳을 거치지 않고서 산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우리 모두는 개발되지 않은 산과 들이 불편할 뿐이고 그래서 자연은 잘 정리되고 관리되어야만 하는 대상인가요. 저잣거리의 소란을 피해 이곳에 안식의 터를 마련했던 사람들은 또 다른 저잣거리로 변한 이곳을 떠나 다시 어디로 옮길 수 있을까요. 옮겨본들 '개발'이 뒤를 따를 테니까요. 머지않아 이곳의 멧돼지 일가는 밀려드는 인간들과 눈높이를 맞춰가며 살아야 하고 자기들의 공간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어디론가 떠나거나 대가 끊기게 되겠지요.
☞ 글·사진=강석호
[트레킹 명소] 통방산 아기 소나무와 생명의 기(氣)
강석호(트레킹 동호인)
|ViEW 2,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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