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8000대1과 420대1. 이 숫자는 인도와 한국의 아픈 역사를 증언하는 비율이다. 영국은 1930년대 중반 3억4000만명에 이르는 인도를 지배하는 데 고작 1만2000명의 관리만 필요했다. 반면 같은 시기 일본은 2200만명의 한국인을 탄압하기 위해 5만2000명이 있어야 했다. 한국이 인도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많은 숫자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식민지배에 있어 식민본국의 군사적 강제력과 정치적 탄압 및 경제적 약탈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의 ‘협력’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로널드 로빈슨(1920~1999)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에는 피식민지 국가에서의 ‘협력’이 큰 역할을 한다는 ‘주변부이론’을 주장했다.


협력이란 식민제국과 식민지 사회 집단이나 계급 간의 이해관계가 접근하는 것을 표현하는 용어로 협동과 달리 개인적 이익을 위해 공동체 전체의 희생을 감행하는 연관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됐다.

◆스스로 전복된 인도, 현혹된 친일파

영국은 인도에 존재하는 종교적·종족적·사회적 분열을 이용해 정교하게 균형 잡힌 지배망을 만듦으로써 적은 인원으로 인도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다.


영국은 1833년 벵골 통제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토머스 매콜리의 제안에 따라 ‘피와 피부색은 인도인이지만 취향, 견해, 도덕률, 지식에 있어서는 잉글랜드인’인 사람을 많이 길러내 식민통치하는 데 활용했다.

또 영국은 1853년부터 인도에서 엄격한 경쟁시험에 의한 엘리트 관료인 ‘인도문관’제를 채용했는데 아주 적은 수이지만 인도 사람 가운데서도 인도문관이 됐다. 바네르지와 나오로지 같은 민족주의 지도자는 관료제가 인도인의 것이 되면 인도가 겪고 있는 고통이 해결될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관직의 안정성, 고위 관직에 수반되는 특권과 영광, 그리고 약간은 봉사하기 위해 관료의 길을 택했다. ‘근대화’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영국 지배가 토착 지배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다. 지주, 도시 상인, 서구식 교육을 받은 계층 등 주로 상층 또는 귀족 출신이 영국의 식민지배에 협조했다.


지난 2월 친일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서울 성북구는 지역 주민들의 동의를 받아 ‘인촌로’ 도로명판을 ‘고려대로’로 교체했다. /사진=뉴시스 이영환 기자

한국의 친일 역적도 비슷한 양상을 나타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불법적으로 강점하기 이전의 친일파는 일부 왕족과 대한제국 정부관료 및 문명개화운동에 참여했던 개화파들이었다. 이들은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독립’을 명문화하자 환호했고 을사늑약 후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이 자립할 능력이 있으면 일본은 조선에서 물러갈 것”이라고 말하자 공언에 현혹됐다.
근대화 지상주의 함정에 빠졌던 ‘개화파 친일 역적’들은 청, 영국, 러시아보다는 일본의 근대적 지배 아래 개혁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데 그치지 않고 창씨개명과 한글말살 및 노동자 징용과 학생 징병에 적극 앞장섬으로써 매국과 반민족이라는 이중적 역적이 됐다.

3·1운동과 상하이임시정부의 줄기찬 항일투쟁에 힘입어 한국은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아직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실정이다. 아직 문화적(언어와 의식)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언론사에서 일본식 용어(미다시·도꾸누끼·사스마리…)가 여전히 쓰이고 일본어를 한글로만 바꾼 학술용어(대차대조표·기회비용·구성의 오류…)를 우리말인양 부끄럽지 않게 사용한다. 여전히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제2의 ‘창씨개명’이라고 할 수 있는 ‘도로명 주소’와 ‘한글전용’(국어기본법)이 행정폭력을 업고 강행된다.

‘과연 일본’이라며 연휴 때마다 일본으로 몰려가는 관광객이 공항을 가득 채우고 번화가마다 일본 음식을 찾는 사람이 홍수를 이룬다. 참으로 민망한 자화상이다.

◆이익 좆는 ‘역사의 죄인’ 될건가

1789년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자 당시 영국 정계의 유명한 논객이던 에드먼드 버크는 <성찰>(1790)이란 팸플릿을 써서 반대했다. “프랑스 신사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풍족한 몫을 받았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그 빛으로도 밝혀지지 않았는지 인류의 무지와 오류를 강하게 믿으며 행동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독립선언서와 독립전쟁에 큰 영향을 끼쳤던 토머스 페인은 이에 대해 <인권>이란 팸플릿으로 비판했다. “슬기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일에 놀라고 어리석은 사람은 슬기로운 일에 놀란다. 나는 버크의 놀라움을 어느 쪽이라고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혁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버크는 역사의 옳은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논쟁에서 지고 말았다. 페인의 <인권>은 현재까지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지만 <성찰>을 찾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아시아를 버리고 유럽이 돼야 한다’는 ‘탈아입구론’을 폈던 후쿠자와 유키치와 함께 “일본이 세계의 모든 장점을 흡수하는 지위에 서 있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궤변을 만들어 낸 시라토리 구라키치도 역사의 실패자라고 할 수 있다.

전후 세대인 요나하 준은 <중국화하는 일본>이란 책에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한 것이 아니며 섣부르게 서양을 따라갔다가 군국주의화로 실패했으니 이제라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21세기에 진정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몸뚱이의 편함은 짧고 민족의 기억은 영원하다.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옳음을 버린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그 결과로 자자손손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멍에를 씌운다. 역사와 하늘에 지은 죄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다. 언제 어디서든 눈 밝고 귀 맑으며 마음 깨어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86호(2019년 4월2~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