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시 출신인 김 할머니는 14세였던 1940년 일본군에 끌려가 8년 동안 중국과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을 떠돌며 고초를 겪었다. 1948년 8월15일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결혼과 출산은 포기해야 했다.
김 할머니는 1992년 위안부 피해를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렸고 1993년 최초로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위안부의 진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했다. 이후 김 할머니는 나라 안팎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매년 여러 차례 해외 캠페인을 다니며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했고 위안부 피해자 쉼터에서 함께 지낸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나비 기금'을 발족해 분쟁지역 아동과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을 돕는 인권 운동을 이어갔다.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 재판의 원고로 참여해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2015년 이후에는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규탄하고 화해·치유재단 해산과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촉구했다. 2016년부터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재일조선학교 학생 6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던 김 할머니는 지난해 11월22일 신촌 세브란스 병실에 누운 채로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쓰라며 3000만원을 더 내놓았다. 본인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분쟁지역 아동과 전쟁 중 성폭력 피해 여성을 돕는 인권 활동에 매진하기도 했다.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는 "돌아가시던 날 오후 5시 김 할머니가 갑자기 눈을 뜨고 사력을 다해 마지막 말씀을 했다. (일본 정부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라며 절규에 가까운 분노도 표하셨다"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워 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다"고 전했다.
김 할머니가 별세한지 6년이 흘렀다. 현재 한국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총 8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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