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왕께서 영대(靈臺)라는 건물을 지을 계획을 세우시고(經始靈臺) 이를 설계하고 실행하시니(經之營之)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와서 도왔다.'

옛 문헌에 등장하는 '경영(經營)'의 어원이다. 치밀한 설계와 역동적인 실행이 결합할 때 비로소 민초들의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기업들은 치밀한 설계 대신 '사법적 방어'에 골몰하고 역동적인 실행 대신 '소송의 굴레'에 갇혀 있다. 성장을 위한 에너지를 경영권 방어에 소진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우리 기업들은 ESG 경영과 주주 환원을 실천하며 '코스피 5000 시대' 안착을 위한 체질 개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더 빠른 속도를 주문한다. 새 정부 들어 세 번째 상법 개정안이 발의됐고 '자사주 소각 의무화'까지 논의되는 이유다.

본래 기업은 적대적 M&A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하거나 긴급한 자금 조달, 임직원 스톡옵션 부여 등 '전략적 경영 판단'을 위해 자사주를 보유한다. 물론 일부 기업 최대주주가 적은 지분으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활용해 온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처한 상황이 저마다 다른 기업들에 자사주 소각을 일률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에게서 최소한의 보호 장구인 방패를 빼앗는 것과 같다. 자사주 소각이 단기적으로 주식시장을 부양할 수는 있겠으나 기업의 지속 가능한 경영 기반은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세계 주요국들이 자국 기업의 글로벌 주도권 확보를 위해 거액의 보조금을 투입하며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에만 '이중 족쇄'를 채워서는 안 된다. 미래를 위한 투자가 당장의 주주 환원 압박에 밀려 장기적인 기업 가치가 훼손될까 우려스럽다.

자사주 소각 강제화는 기업이 보유해야 할 유동성을 소진시켜 연구개발(R&D)과 신산업 진출을 가로막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단기 주주들의 요구에 밀려 곳간을 비운 기업이 글로벌 패권 전쟁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다를 바 없다.

우리 기업들은 글로벌 무대에서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정부 역시 경영자가 '주가 관리인'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기업의 자율적 경영 판단을 존중하고 경영의 영역을 과도하게 사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기업은 주주, 고객, 근로자가 함께하는 사회적 공동체다. 경영이란 단순히 숫자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하고 구성원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기업이 규제의 숲을 헤매느라 성장의 타이밍을 놓친다면 그 손실은 고스란히 국가 경제의 몫이다.

잠재성장률이 1%대로 떨어진 한국 경제에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이 절실하다. 경영자가 형법전과 상법 조문을 뒤지는 대신 미래 기술을 연마하고 초일류를 꿈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최후의 경영권 방어 수단마저 빼앗긴 채 기업을 사지로 떠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와 국회는 규제의 칼날을 들이밀기에 앞서 기업이 왜 자사주라는 방패를 들 수밖에 없는지 살펴야 한다. 기업 또한 투명한 경영과 혁신으로 사회적 기대에 응답해야 한다. 기업가 정신이 들불처럼 일어날 때 대한민국 경제에 새로운 영대(靈臺)를 세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