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거부하고 기존 간접선거제도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護憲·헌법 보호) 조치'를 발표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전국적으로 퍼져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이기지 못한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여당) 대표는 6·29 선언을 통해 개헌을 약속했다.
이에 민정당과 제1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은 1987년 7월31일 '8인 정치회의'를 구성해 개헌 논의를 시작했다. 민정당에선 권익혁·윤길중·이한동·최영철 의원, 통일민주당에선 김대중계 이용희·이중재 의원과 김영삼계 김동영·박용만 의원이 참여했다.
소수 정치 엘리트들의 '밀실 타협'이란 비판도 받았지만 국민들의 열망인 대통령 직선제를 헌법에 명시했다는 점에선 큰 성과로 평가받는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최근 국회에서 열린 헌법개정 대토론회에서 "6·29 선언으로 갈등과 대립이 해소된 상태에서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통 큰 양보로 8인의 개헌 기구가 4대4로 구성된 것"이라고 했다.
당시 개헌 논의는 1개월 간 이뤄졌다. 여야가 대통령 직선제를 명시하는 데엔 공감했지만 헌법 전문에 ▲5·18 민주화운동 정신 ▲군의 정치적 개입 금지 ▲국민 저항권 등의 내용을 넣을지를 놓고 첨예한 대립이 이어졌다.
논의 끝에 5·18 정신은 포함되지 않았다. 국민 저항권의 경우 정권에 대한 항쟁을 상시화·합법화할 우려가 있다며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내용을 넣기로 타협했다. 군의 정치 개입 금지도 헌법 제5조에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는 내용으로 순화했다.
권력 구조와 임기에 대해 여당인 민정당은 대통령 6년 단임제를 주장했으나 야당인 통일민주당은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요구했다. 당시 여야는 한 발씩 양보해 현행 헌법의 기틀인 '대통령 5년 단임제'로 타협했다. 또 야당은 부통령제 신설을 요구했으나 여당이 반대했고, 보완장치로 국회의 국정감사권이 부활했다.
각종 논의와 합의 끝에 여야는 8월31일 헌법개정안에 서명했다. 개헌안은 9월18일 발의됐고 10월12일 찬성 254인, 반대 4인으로 의결됐다. 이 헌법 체제를 통해 치러진 그해 12월 대통령 직접선거에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미국의 수정헌법(amendment)처럼 부족한 부분을 계속해서 채워가는 형태의 개헌 논의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헌법을 직접 수정해 덮어쓰는 대신 기존 헌법의 끝에 새로운 조항을 덧붙이는 방식이다. 미국은 1791년 12월 비준된 최초의 10개 수정 조항을 묶어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고 부르는데, 현재까지 총 27개의 수정헌법이 추가됐다.
미국의 정치인들은 헌법 제정 당시 각 시대의 일시적 요구에 의해 헌법을 수시로 개정하지 않도록 개헌 과정을 까다롭게 했다. 미국에서 헌법을 수정하려면 제안과 비준 절차를 모두 거쳐야 한다. 연방 상·하원 모두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한다. 제안된 수정안이 실제 헌법에 반영되려면 50개 주 가운데 4분의 3 이상(38개 주 이상)의 주의회가 비준해야 한다.
헌법학 전문가들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개헌 논의가 불발된다고 하더라도 개헌 논의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면서 "미국의 수정헌법 형태의 부분 개헌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한편 우 의장은 오는 3월17일까지 개헌특위를 구성해달라고 여야에 촉구했다. 6월 지방선거에서 개헌을 위한 국민 투표가 동시에 이뤄지려면 4월7일까지 헌법개정안이 발의돼야 한다는 게 우 의장의 설명이다. 우 의장은 여야 간 이견이 적은 ▲불법 비상계엄 방지 제도화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지역균형발전 명시 등 3가지를 '부분 개헌'하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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