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플랫폼이 쇼핑·여행·결제·콘텐츠 시장으로 영향력을 넓히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의 중국 시장 입지는 갈수록 위축되면서 한중 소비 생태계의 비대칭 구조가 심화되고 있다. 사진은 중국인 관광객을 위해 한자로 작성한 안내문이 붙어 있는 서울 중구 명동거리로 기사의 직접적인 내용과 관련이 없음. /사진=뉴스1
#. 다음 달 여름휴가를 앞둔 30대 직장인 A씨는 트립닷컴으로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했다. 퇴근길에는 중국 무협 웹소설을 읽고 집에서는 테무를 통해 생활용품을 주문한다. 주말에 들른 대형마트에서는 중국산 AI 판촉로봇이 고객을 맞는다. 여행과 쇼핑, 콘텐츠 소비에 이르기까지 중국 기업들은 한국 소비자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한국 소비자와의 접점을 넓혀가지만 한국 기업들의 중국 시장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한국 소비자들은 중국 플랫폼을 일상적으로 이용하고, 한국을 찾은 중국 관광객들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명동에 이르기까지 유니온페이 등 자국 플랫폼으로 소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 시장에서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쪽은 열리고 다른 한쪽은 막힌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 속에서 양국 간 소비 생태계의 비대칭 구조가 심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온라인쇼핑(이커머스) 부문 지난 6월 기준(와이즈앱·리테일) 테무의 국내 월간활성이용자수(MAU)는 830만명으로 집계됐다. 업계 추정 국내 2위 플랫폼인 네이버플러스스토어(880만명)를 바짝 뒤쫓고 있는 수준이다. 무료배송과 대규모 할인, 공격적인 마케팅을 앞세운 중국 이커머스 플랫폼들이 국내 소비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모습이다.


여행 시장에서도 중국계 플랫폼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 기준 트립닷컴의 MAU는 347만명으로 NOL(야놀자·359만명)를 바짝 뒤쫓고 있다. 항공권과 호텔 예약을 넘어 현지 투어와 입장권까지 하나의 플랫폼에서 제공하며 여행 전후 소비 전반을 흡수하는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결제 분야에서는 유니온페이가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명동과 동대문, 주요 백화점과 면세점 등 관광 상권을 중심으로 사용처가 확대되면서 중국 관광객들은 별도 환전 없이 자국 결제망으로 소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유니온페이는 국내 95만개 이상의 가맹점과 연계된 QR 결제망을 구축하며 결제 인프라를 확대하고 있다.

콘텐츠와 지식재산권(IP) 분야에서도 중국 기업들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팝마트의 캐릭터 '라부부'는 팝업스토어마다 오픈런 현상을 일으키며 젊은 층의 소비 문화를 이끌었다. 웹소설·웹툰 시장에서는 중국 원작 번역물 유통이 늘고 있으며 중국 플랫폼이 국내 작가와 직접 협업을 추진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오프라인 시장에서도 존재감은 커지고 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국내 서빙로봇 시장의 70% 이상, 청소로봇 시장의 54%를 중국산 제품이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형마트와 쇼핑몰을 중심으로 AI 판촉로봇까지 등장하며 서비스 로봇 시장 전반에서 중국 업체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모습이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중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가격에 있었다면 최근에는 플랫폼과 결제망, 콘텐츠 IP를 통해 소비자 접점을 직접 확보하는 단계로 진화했다"며 "상품 판매를 넘어 소비 생태계 전반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커진 중국 기업 존재감…빗장 걸린 중국 시장과의 온도 차
중국 서빙 로봇 판매 기업 브이디컴퍼니가 이마트에브리데이와 손잡고 선보인 AI판촉 로봇. 광고와 제품 진열, 판촉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사진은 기사의 직접적인 내용과 관련이 없음. /사진=브이디컴퍼니
중국 기업들이 한국 소비 생태계 전반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동안 한국 기업들의 중국 사업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사드(THAAD) 사태 이후 이어진 규제와 소비 침체, 현지 기업 성장 등의 영향으로 롯데마트와 롯데백화점, 이마트 등 유통 기업들은 사업 축소 또는 철수를 선택했다. 한때 중국 시장을 핵심 성장동력으로 삼았던 아모레퍼시픽 역시 사업 구조조정에 나서며 중국 전략을 재정비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경기 둔화와 정책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신규 투자 역시 위축되는 분위기다.
사드 사태는 국내 기업들의 중국 사업 환경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 대표 사례로 꼽힌다. 2017년 롯데마트는 사드 부지 제공 이후 중국 내 점포들이 잇달아 영업정지 처분을 받으며 결국 중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한때 112개 점포를 운영했던 롯데마트는 사업 정리 과정에서 대규모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화장품 업계 역시 중국 소비 둔화와 현지 브랜드 성장의 영향을 받았다. 아모레퍼시픽은 중국 시장 성장세 둔화에 대응해 현지 사업 구조를 재편하는 등 과거와 같은 고성장 국면에서 벗어난 모습이다.

국내 대표 플랫폼 기업들도 중국 시장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네이버는 중국 직접 진출보다 일본과 동남아 시장 확대에 집중하고 있으며 쿠팡 역시 대만을 제외한 중화권 사업 확장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 또한 비슷한 상황이다. 일부 문화 교류 재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만 K팝 공연과 방송 콘텐츠 사업은 여전히 인허가와 정책 변수의 영향을 크게 받는 분야로 꼽힌다. 중국 플랫폼과 콘텐츠가 한국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사업을 확대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양국 시장의 사업 환경과 개방 수준 차이가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관계자는 "중국 시장은 여전히 규모가 크고 매력적인 시장이지만 외국 기업 입장에서는 규제와 정책 불확실성이 높은 곳"이라며 "사드 사태 이후 한국 기업들의 투자 심리가 크게 위축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중국 플랫폼의 영향력이 커진 뒤 규제에 나서는 사후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AI 시대에는 기술과 플랫폼 변화 속도가 빠른 만큼 정부가 선제적으로 제도와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플랫폼 경쟁은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경쟁력의 문제"라며 "개인정보 보호와 공정한 경쟁 환경 조성을 위한 산업 전략이 함께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승찬 용인대 중국학과 교수는 "일부 소비자들은 여전히 중국 제품을 저가 상품으로 인식하지만 게임·웹툰·AI·로봇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국 기업들이 이미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했다"며 "중국을 무조건 경계하기보다 산업별 경쟁력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산업 주권을 지키기 위한 생태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필요에 따라서는 중국 기업과 협력해 제3국 시장을 공동 공략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