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지축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재계 수장'이라는 위치에도 불구, 최근 들어 전경련의 떨어진 위상과 역할부재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져가는 추세다.
1961년 창립돼 지난해 '50돌'을 맞았던 전경련은 재계를 대표하는 역할은 고사하고 제 밥 그릇 챙기기에만 골몰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회 전체의 공정성과 경제 전체의 발전을 위한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최근 들어선 정치권에서도 전경련의 해체를 거론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박영선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은 지난 1월30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를 통해 전경련 해체를 촉구했다. 박 최고위원은 "정부는 지난 4년간 재벌이 잘 돼야 서민이 잘 산다는 낙수(落水)이론을 펴면서 재벌이 해달라는 대로 법을 날치기까지 하면서 통과시켰다"며 "그런데 이제는 대통령 말 한마디로 재벌 딸들이 빵집운영에서 철수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는 대단한 정경유착이 아닐 수 없다. 재벌들을 위한 로비 창구역할을 해왔던 전경련의 해체를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장단 회의 유명무실…4대 총수 자주 빠져
무엇보다 전경련의 위상과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가장 큰 징후는 유명무실해진 회장단 회의의 분위기에서 잘 드러난다.
핵심 그룹 총수들로 구성된 회장단 회의는 전경련의 대표적인 회의이자 주요 안건을 처리하는 중추기구다. 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 초까지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는 총수들의 출석률이 높지 않아 회의기구 자체가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지난 1월12일 전경련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허창수 전경련 회장(GS그룹 회장) 주재로 신년 인사를 겸한 새해 첫 회장단 회의를 열어 경제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러나 새해 첫 회의라는 상징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희(삼성), 정몽구(현대차), 최태원(SK) 구본무(LG) 회장 등 4개 그룹 총수가 모두 불참해 김 빠진 회의가 되고 말았다. 구본무 회장은 오래 전부터 전경련과 거리를 둬 왔고 이건희·정몽구 회장은 해외 출장, 최태원 회장은 불구속 기소 상태라 이들 총수의 회의 참석 가능성은 일찍부터 낮았다. 결국 새해 첫 회장단 회의는 허창수 회장과 회장단 7명이 참석한 '조촐한 회의'로 전락했다.
회장단 회의의 '맥 빠진' 분위기는 두달 앞선 지난해 11월 그해 마지막 정례회의에서도 고스란히 연출됐다.
당시 신라호텔에서 열린 회장단 회의 역시 허창수 회장과 정병철 상근부회장을 비롯해 이준용 대림 회장, 박용현 두산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현재현 동양 회장, 정준양 포스코 회장, 이웅열 코오롱 회장만이 참석했다. 정 부회장을 제외하면 회의에 참석한 그룹 총수는 총 7명으로 두자리 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는 지난해 3월초 허 회장 취임 이후 처음으로 열린 회의에서 4대 그룹 가운데 구본무 회장을 제외한 이건희, 정몽구, 최태원 회장 등이 모두 참석해 새로 출범한 전경련에 힘을 실어준 때와 크게 비교된다.
재계 한 관계자는 "그동안 회장단 회의에선 그래도 13명 정도의 총수들이 참석했었다"며 "하지만 최근 들어 회의 참석률이 뚝 떨어졌는데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소지가 많아 전경련의 위상과 역할이 계속 반감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득보다 실이 더 많은 동반위와의 '갈등' 동반성장위원회(이하 동반위)와 갈등국면에 들어선 것 역시 전경련의 위상을 크게 떨어뜨리는데 한몫 하고 있다. 전경련은 작심한듯 새해벽두부터 동반위와 크게 충돌했다.
지난 1월5일 동반위는 배전반과 GIS(가스절연개폐장치), EOA(유기계면활성제) 등 3개 품목의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을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전경련이 "동반위가 자율합의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정했다"며 절차의 하자를 문제 삼은데 따른 반격이었다.
동반위는 "위원회가 충분한 논의와 심사숙고를 거쳐서 결정한 의견에 대해 적합업종 절차상 이해관계에 얽혀 반대하는 것은 대기업 측의 동반성장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결국 전경련이 절차를 따르지 않으면서 적합업종의 선정과정 절차를 거론하는 것은 위원회 활동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사실 동반위와 전경련의 충돌은 지난해 말 초과이익공유제를 놓고 싸울 때부터 이미 예견됐다. 지난 12월13일 전경련과 동반위는 이익공유제를 협의하기 위한 본 회의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경련은 "동반위가 이익공유제를 일방적으로 강행하려 한다"며 본회의 불참을 선언했고, 동반위도 "본회의를 강행하겠다"며 충돌 양상을 빚었다.
당시 전경련측은 "이익공유제를 국가 차원에서 제도화한 나라는 한 곳도 없다. 이익공유제와 관련해 충분히 합의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동반위가 일방적으로 이익공유제를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이익공유제보다 성과공유제가 재계의 대안"이라며 "실행 가능성이 있고 구체적인 성과가 있는 제도를 도입하자"고 강조했다.
반면 동반위는 "동반위는 사회적 합의를 하는 민간기구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강행처리할 이유가 없다. 이견이 있으면 본회의에서 논의하자"고 전경련에 '맞불'을 놨다.
재계에서는 이번 전경련과 동반위의 갈등을 놓고 서로 간 힘겨루기 양상으로 번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건만 해도 전경련이 동반위와의 협조에 '제동'을 거는 것은 이익공유제 카드를 미연에 봉쇄하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는 것이고, 동반위 역시 전경련의 이같은 생각을 간파하고 강력대응에 나선 것이라는 해석이다.
'재계 맏형' 전경련의 2012년은 얼마나 많은 재벌총수들을 회의 자리에 불러들이고, 동반위와의 현실적인 협조체제를 어떻게 구축해 나가느냐에 따라 명과 암이 크게 갈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