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1000m 황매평전, 누렇게 마른 풀들이 바람에 눕는다. 봄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다. 꽃을 시샘하는 ‘꽃샘’도 남았으니 말이다. 바람을 따라 차를 달린다. 바위 절벽에 매달린 것 같은 작은 암자가 아슬아슬하다. 절벽 아래서 수직으로 솟구치는 바람이 정취암 풍경을 울린다. 남사예담촌 돌담길까지 따라 온 풍경소리가 기와지붕 위에서 공명하는 것일까? 돌담에 내린 햇볕이 그윽하다. 이런 하루라면 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황매평전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다
하늘을 바라보며 농사짓던 시절, 한해에 한단씩 산기슭을 거슬러 올라가며 일궈 논을 만들었다. 고단한 삶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그 골짜기 다랭이논이 황매산 기슭에 펼쳐졌다.
황매산 아래 다랭이논. 산비탈을 올라가며 만든 논.
황매산 황매평전에서 보이는 지리산.
능선은 곳곳에 봉우리를 세우고 그 중간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안식 같은 평지를 만들어 놓았다. 산과 다랭이논 사이에 사람 사는 마을이 그렇게 박혀 있다.
황매산으로 가는 길, 황매산 아래 신촌마을 만암마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늘 아래 우뚝 솟은 저 봉우리가 정상인가 보다. 해발 1108m, 그 높이에 이르러 산은 성장을 멈추고 사람들을 품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그 품으로 들어간다. 황매산에서 여행자를 처음 반기는 것은 영화주제공원이다. <단적비연수>, <천군>, <바람의 나라>, <주몽>, <태왕사신기> 등 영화와 드라마를 이곳에서 촬영했다. 촬영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3000여평의 공간에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재현한 세트가 눈길을 끈다.
세트장에서 1km 조금 넘는 거리를 걸으면 황매산 정상이다. 정상에 이르기 전에 만난 황매평전은 정상보다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해발 1000m에 펼쳐진 평원, 그곳에는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풀들도 바람 따라 쓰러지고 나부낀다.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사방에서 불고 지나간다.
황매산 영화 주제공원. 뒷 산이 황매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계단을 놓았다. 평원에도 사람 다니는 길을 구분했다. 우리는 그 길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맡겼다.
순간 이제 갓 말을 시작한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다니는 후배가 한 말이 생각났다. “아이들은 여행지의 모든 것을 세포로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맞고 틀리고는 중요치 않다. 지금 온몸을 감싸는 바람을 나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어른은 아이가 되고 아이는 큰다. 세포에 새겨진 황매평원 바람의 향기는 적어도 아이에게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게다가 산처럼 우뚝 선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바람 앞에 선 아이라면 먼 훗날 그 자신도 아이의 손을 잡고 이곳에 오를 것이다. “옛날 내가 너만했을 때 할아버지 손잡고 여기 이렇게 서 있었다”고 말하며.
저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구름에 가린다. 구름 사이로 굽이치는 산줄기들이 마음에 박힌다. 지금 나는 너에게 간다.
◆절벽에 핀 연꽃, 정취암
산길을 걸으며 아이들을 생각했다. 큰 걸음 따라오던 종종걸음들, 한시도 쉬지 않고 재잘대던 그 작은 입들, ‘까르륵’ 거리던 맑고 투명한 웃음소리들. 자동차 소리, 음악 소리, 공사장 소리,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 속에서만 듣던 그 소리를 지금 여기에 옮겨 놓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정취암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작은 암자를 찾아 가는 길에 이런 수고로움이 무슨 말일까도 생각했지만 정취암에 오르고 난 뒤에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절 마당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속을 후련하게 해준다. 암자가 절벽 위에 세워졌다. 숲 밖에서 보면 바위절벽에 암자가 붙어 있는 모습이니 얼마나 위태롭게 보일까. 그 암자 작은 마당에 서서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밀려오는 희미한 산줄기의 물결을 본다. 산이 바다 같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산줄기들이 점점 가까이 오면서 그 형체를 드러낸다. 사람 사는 마을에 ‘뭉턱뭉턱’ 떨어진 작은 동산도 보이고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도 그 사이로 이어진다.
정취암. 절벽에 간신히 붙어 있는 모양.
바람이 절벽 저 아래서 불어와 풍경을 울린다. 암자 위에 있는 바위 절벽으로 올라갔다. 절벽 바위 아래 암자가 있다. 마당에서 보았던 그 풍경이 암자 지붕에 걸쳐있다. 암자 앞에 나무 한그루 서있다. 불가에서 전해지던 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에 '뜰 앞의 잣나무'렸다.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암자 자체가 깨달음에 이르는 아찔한 실체였을까.
정취암은 신라 문무왕 6년에 의상대사가 지은 절이다. 정취암 부근에는 율곡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절은 원효대사가 지었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고 원효대사가 속세의 나이는 더 많았다. 원효대사는 율곡사에 있으면서 보리죽을 먹으며 정진하고 있었는데 의상대사는 하늘에서 내려다 주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하루는 원효대사가 정취암으로 놀러갔다. 점심때가 되자 원효대사는 “오늘은 나도 천공(하늘에서 내려다 주는 음식)으로 점심공양을 할 수 있겠네”라고 하며 음식을 기다리는 데 때가 다 지나도 천공을 내려다 주는 선녀들이 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원효는 초연이 일어나 율곡사로 떠났다. 원효대사가 자리를 뜨자 선녀들이 천공을 가지고 의상대사가 있는 정취암으로 내려왔다. 의상대사가 “왜 이제야 오냐”고 묻자 선녀들은 “원효대사를 옹위하는 팔부신장이 길을 막고 있어 지금 오게 됐다”고 대답했다. 이에 자신의 도량이 원효대사에게 미치지 못함을 깨달은 의상대사는 그날부터 천공을 받지 않고 더 깊은 정진 수양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까부터 절집 툇마루에서 자고 있는 개 한마리가 눈에 밟힌다. 나오는 길에 자고 있는 개를 깨웠는데 ‘꿈뻑’ 느리게 눈을 떴다 감더니 그 모양 그대로다. 이 절벽 위에서 초연하다.
◆돌담길을 걸으며 마음을 쉬게 하다
정취암에서 내려와 1006번 도로를 타고 단계 쪽으로 향한다. 길은 20번 도로와 만나고 신안면에서 단성교를 건너 남사예담촌으로 향하는 길목. 단성교를 건너 단성중고 부근에 차를 세우고 건너온 단성교 쪽을 바라본다. 적벽산의 붉은 빛이 황금빛 저녁햇살과 어울렸다. 그 아래 경호강이 흐른다. 이곳 풍경은 노을 필 때 봐야한다.
남사예담촌 흙돌담 골목길.
적벽산과 경호강이 어울린 풍경은 남사예담촌으로 가는 여행길에 덤이다. 차는 이윽고 남사예담촌 마을 작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림자가 길어진다. 이곳이 오늘 여행의 마지막 코스라서 그런지 저녁 햇살처럼 발걸음이 게을러진다.
남사예담촌은 한옥과 돌담길의 운치가 살아 있는 마을이다. 민속촌처럼 일부러 꾸며 놓은 옛 마을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다. 손 때 밴 마루며 기둥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낸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한옥은 따듯하다. 한옥 마당에 고인 햇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솟을대문 밖 풍경이 반쯤 열린 나무대문 사이로 들어왔다. 황금빛 햇살이 흙벽을 비추는 데 마른 담쟁이 잎 하나가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다. 흙과 돌, 기와가 어울린 담장에 담쟁이 마른 잎 하나라니! 오래된 명작의 한장면에 여행자가 서 있는 것 같다.
남사예담촌 사효재.
도시의 아파트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여유로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한옥. 한옥과 한옥 사이로 난 돌담길. 그 길을 걷는 일은 마음을 치유하는 일이다. 한옥 돌담길을 걷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향의 원형으로 가는 길이다. 서울이 고향인 사람도 이런 길을 처음 보는 아이들도 기억의 저편 집단 무의식의 골방에 갇혀 있던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
담장 안 한옥 풍경이 단아하고 정갈하다. 마당에 고인 햇볕은 그 모양 그대로 마당에 쌓인다. 사위가 고즈넉하다. 한옥에서는 가만히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하다.
‘이씨고가’ ‘최씨고가’ ‘사양정사’ 등 유명한 문화재 한옥들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마지막 들른 곳이 ‘사효재’다. 아버지를 향해 날아드는 칼을 몸으로 막아 아버지를 살렸다는 효자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편리’라는 물질문명의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이야기를 남사예담촌 돌담길은 들려준다.
[여행정보]
<길안내>
자가용
*황매산(황매산 영화주제공원) 대전-통영고속도로 산청IC - 산청읍내 - 차황면·황매산 방향 59번 도로 - 차황면 - 하나로마트 차황점 지나 - 황매산(황매산 영화주제공원) 방향으로 조금만 가다 보면 길 왼쪽에 황매산 영화주제공원 입구 아치 조형물 - 아치 조형물 통과해서 약 6km 정도 더 가면 황매산 영화주제공원
*황매산에서 정취암 가는 길 황매산에서 다시 차황면으로 나와 1006번 도로 철수리·율현리 방향 - 60번 도로와 만나면 60번 도로로 접어들어 조금만 가다 보면 정취암 이정표 있음 - 이정표 따라 가면 됨.
*정취암에서 남사예담촌 가는 길 정취암에서 나와 다시 1006번 도로를 타야 함 - 1006번 도로 신등면 단계리 지나 - 신안면 - 단성교 건너 - 단성면 - 20번 도로 - 남사예담촌
대중교통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산청행 버스가 있다(하루 8회 운행). 산청터미널에서 각 여행지로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문의) 산청교통 : 055-973-5191
<숙박> 산청읍내에 모텔이 몇곳 있다. 황매산 아래 신촌마을, 만암마을과 남사예담촌에 민박집이 있다. 정취암 부근에는 숙박할 곳이 없다.
황매산과 황매산 영화주제공원을 둘러보고 날이 저물면 황매산 아래 신촌마을, 만암마을 민박집에서 숙박을 한다. 황매산과 황매산 영화주제공원을 다 둘러본 뒤 일몰까지 1시간~1시간30분 정도 남았다면 정취암으로 출발. 정취암까지 30분 정도면 도착한다. 정취암 풍경을 감상하고 남사예담촌으로 이동, 1박. 남사예담촌 주변에 식당이 드물다. 10km 정도 떨어진 시천면소재지까지 가면 식당이 있다. (문의) 남사예담촌 민박 : 010-3789-0801
<음식> 산청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산나물 약초가 많다. 산청한방휴양관광지(동의보감촌) 내 ‘약초와 버섯골 식당’에 가면 산나물과 약초 버섯 등으로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약초 등으로 우린 육수로 끓여내는 ‘약초버섯매운탕’은 한끼 식사로 충분하다. 또 약초로 우린 육수에 각종 약초와 버섯, 소고기 등을 넣고 끓여 먹는 ‘약초와 버섯전골(샤브샤브)’ 등이 주요 요리다. (문의) 약초와 버섯골 : 055-973-4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