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식시장의 가격제한폭제도가 수술대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가격제한폭제도가 주가조작 세력이 투자자를 유인하는 도구로 악용되면서 제한폭을 없애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어서다.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는 제도 손질을 위한 방안 검토에 들어갔고 김봉수 한국거래소 이사장도 제도를 보완하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내비쳤다. 김 이사장은 지난달 말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가격제한폭제도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해가며 개선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가격제한폭을 전격적으로 폐지하기보다 대안을 마련한 후 단계적으로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상한가, 투자자 홀리는 독배 가격제한폭제도는 일시적인 가격 급등락을 방지하고 투자자에게 정보를 재평가할 시간을 줌으로써 투자자들의 심리를 안정시키고 가격이 균형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가격대별 정액제로 시행됐던 가격제한폭제도는 1995년 정률제로 변경됐고 6%에서 점차 확대돼 2005년부터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 모두 현행 15%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엔 '상한가 굳히기' 등 시세조종에 악용되면서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됐고 주가조작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상한가 굳히기'는 상한가이거나 상한가가 될 조짐이 보이는 종목에 대해 대량의 상한가 주문을 제출해 투자자들을 유인한 후 다음날 추종매수로 주가가 추가 상승하면 보유주식을 매도해 이득을 챙기는 수법이다.
금융당국은 연초 이후 이 같은 수법을 이용해 시세조종에 가담한 사례를 대거 적발, 검찰 고발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상한가 굳히기'로 수백억원대의 부당이득을 올린 일당이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검찰 및 금융당국에 따르면 전업투자자 편모씨 등은 2010년 말부터 올해 2월까지 정치인테마주 21개를 포함한 52개 종목에 대해 상한가 굳히기 등의 수법을 이용, 400억원에 가까운 부당이득을 챙겼다. 이들은 정치테마주 주식을 집중 매수해 상한가를 만들고 다음날 주가가 추가 상승할 것이라고 믿는 투자자들이 몰리면 주식을 되팔았다.
김준석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가격제한폭제도는 과도한 변동성을 막고자 도입된 제도지만 상·하한가에 가까워질수록 제한폭으로 빠르게 수렴돼 오히려 변동성을 키우는 문제가 있다"며 "이 같은 점이 불공정거래를 용이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제한폭 폐지 '한뜻'…시기·방법은 신중해야
학계 및 금융투자업계에서는 가격제한폭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절대적이었다.
박진우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 교수는 "상·하한가가 투자자들의 심리를 강하게 자극해 오히려 가격을 왜곡시킨다"며 "미국과 유럽 등 선진시장처럼 가격제한폭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가격제한폭까지 오르거나 내린 주식은 다음날에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점을 봤을 때 주가가 급등락하는 당일 가격을 제한하는 조치가 주가를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국내 투자문화 선진화란 관점에서도 가격제한폭제도 폐지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모 자산운용사 임원은 "가격제한폭이 사라지면 정치테마주 등에서 나타나는 뇌동 매매가 사라지고 기업의 가치에 투자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장기투자도 자연스럽게 유도될 것"이라고 말했다.
폐지 시기와 방법은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박연채 키움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가격제한폭은 폐지돼야 하며 그동안 가격제한폭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온 것도 제도를 단계적으로 없애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며 "다만 전격적으로 폐지됐을 경우 시장에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만큼 시기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가격제한폭이 사라지면 호가간 간격이 커지고 그만큼 변동성이 확대돼 시장의 불안정성이 증대될 수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상황을 완화시켜 줄 제도적 장치가 먼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가격제한폭제도 폐지가 가져올 이점보다 문제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며 "시장의 안정성을 저해할 수 있는 요인들에 대한 충분한 시스템을 우선 갖춘 뒤 제도 폐지를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가격제한폭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내 대형증권사 임원은 "최근 시세조종 등에 악용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시장 전체의 안정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며 "제도 폐지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하루에 위아래로 15%씩 움직일 수 있는 현행 변동폭으로도 충분하다"며 "국내 주식시장이 개인투자자 중심으로 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격제한폭 확대나 폐지는 국내 실정에 잘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종목별 거래중단제' 도입 유력
시장 전반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가격제한폭제도를 대체할 방안으로는 '종목별 거래중단제도'(서킷브레이커)가 제시되고 있다.
국내 주식시장에서는 코스피지수 또는 코스닥지수가 전일 대비 10% 이상 하락한 상태가 1분 이상 지속될 경우 30분간 모든 주식거래를 정지시키는 서킷브레이커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종목별 거래중단제도는 시장 전체에 적용되는 서킷브레이커와 마찬가지로 특정 종목이 짧은 시간 동안 일정폭 이상의 등락률을 기록할 경우 개별 종목에 대한 거래를 일시정지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삼성전자의 주가가 1분만에 3% 이상 급등하면 2분간 매매를 정지했다가 재개하고 그 시점을 기준으로 다시 3% 이상 급등하면 2분간 거래 정지 후 매매 재개를 반복하는 식이다.
미국과 유럽 주요 거래소도 이와 같은 방식의 거래중단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김 연구위원은 "가격제한폭의 적용시간과 범위를 좁혀 일중 가격의 흐름과 함께 가격제한폭이 변동되도록 하는 방식이 도입되면 단기 급등은 통제하되 일중 지속적인 가격 변화는 허용돼 투자자들이 상한가나 하한가에 호도될 가능성이 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