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먹고 자란 고향 꿈 50년, 그들은 사람 떠난 바다에 남아 또 한 번의 가을을 맞이한다. 간혹 또 다른 그리움을 찾아 이곳까지 온 여행자의 긴 그림자 길 위에서 헤맬 때면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통하고 바다는 그 때마다 저 달마저 삼켜 버린다.
 
계절이 바뀌는 바다는 팔색조다. 가슴 시리게 파란 하늘을 안고 잔잔한 호수처럼 빛나다가도 끝없는 안개 속에 파묻힌다. 안개가 걷히고 노을이 피는 가하면, 구름을 몰고 온 바람이 파도마저 백사장에 흩뿌려 놓는다. 바다는 그렇게 열병 같은 여름을 보내고 모든 것을 수렴해야 하는 가을을 맞이한다.  

◆빨간 등대의 기억

아주 오래 전 속초 동명항 방파제를 한 여인과 함께 걷고 있었다. 방파제 끝에는 빨간 등대가 희미하게 보였다. 빗방울은 안개처럼 곱게 부서져 공중을 떠다녔다. 우리는 안개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여겼고 조심조심 그 속으로 걸었다. 안개의 강을 건너자 빨간 등대가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그곳에 도착한 연인들은 하얀 웃음을 나누고 있었다. 빨간 등대 아래에 올라선 우리도 그들처럼 웃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십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고 다시 찾은 동명항은 많이 변해 있었다. 방파제에 줄지어 있던 파라솔도 회를 파는 아줌마들도 없었다. 물론 비도 오지 않았다. 대신 항구 앞에 2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다.

변하지 않았으리라는 기대가 무너진 가슴은 허전했다. 비가 오지 않는 것도 서운했다. 그날 그 방파제와 그 사람들과 그 비와 그 바다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휑’한 바람이 방파제를 쓸고 지나간다. 그 길을 따라 빨간 등대가 있는 곳까지 걸었다. 등대는 있었지만 수리 중이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끝에 ‘공사중 출입금지’를 알리는 차단기가 설치됐다. 추억으로 가는 길마저 막혀버린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로 뻗어 나간 바위 끝에 정자, 영금정

◆영금정, 바다가 타는 거문고 줄

추억에서 돌아 나와 우리는 동명항 회타운 2층 바다가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오징어와 놀래미를 시키고 소주를 마셨다. 먹구름이 몰려들었으나 비는 오지 않았고 간혹 노을빛이 구름 사이에서 햇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구름이 걷힌 동명항의 아침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새벽바다를 열고 아침을 준비하는 바다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우리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오늘 오징어 시세가 비싸다’는 둥 ‘문어 좋은 게 들어왔다’는 둥 여행자를 맞이하려는 그들의 준비는 벌써 몇 번의 아침을 그렇게 열었던 것일까.

방파제 돌무더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는 낚시꾼의 등 뒤로, 바다를 떠다니는 유람선 깃발에도, 팔짱 낀 연인들의 하얀 웃음에도, 자맥질 하는 해녀의 머리 위에도 파란 하늘과 맑은 햇살은 내려앉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평화스럽고 안정적이었다. 항구가 있는 바다 건너 사람 사는 마을 뒤로 설악이 한 눈에 들어왔고, 설악의 큰 산줄기와 사람 사는 마을 사이에 병풍 같은 거대한 바위산이 뿌연 공기 속에서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등대의 길에서 돌아 나와 발걸음을 향한 곳은 항구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영금정이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거문고 타는 소리와 같다 하여 그곳 바다와 바위산을 통틀어 ‘영금정’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바다를 향해 고개를 내민 정자에 ‘영금정’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원래는 바다 저 밑에 뿌리를 두고 정자를 받치고 있는 너럭바위와 그 바위가 이어져 육지에서 솟은 바위산이 그 이름의 주인이다.

바다 위 정자에 서니 햇살 부서지는 물결이 풍요로운 가을 들판 같았다. 꽃 피어야 할 때 꽃 피지 못하거나, 꽃 피고서도 열매 맺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고서도 거두지 못하는 일도 사람 사는 이치 중 하나임에도 아직까지 실수 때문에 후회하고 반성하지 못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사람의 가슴에 영금정 세찬 파도가 들이친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흘려보내고 사랑은 사랑으로 완성할 줄 알아야 하는 데, 온 몸을 울려 소리를 내는 거문고 현의 노래는 언제 다 부를 수 있을까.
 

청호대교와 다리 밑에 고기잡이 배

◆못 다 부른 노래, 청호동 망향가

영금정에서 나와 청호동으로 들어가는 갯배 선착장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1분도 안 되는 시간이면 갯배를 타고 청호동을 갈 수 있다. 이 마을과 저 마을을 갈라놓은 골 좁은 바다 위로 갯배가 움직인다.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 끌어서 사람을 건네준다. 어떻게 보면 갯배는 청호동 사람들의 마음을 닮았다.

청호동은 한국전쟁 때 피난 내려온 함경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전쟁의 포화를 피해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은 부산 거제도 등지에 흩어져서 살았는데,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모여 살자는 취지 아래 1951년부터 이곳 청호동으로 모여들게 됐다.

조금이라도 더 고향 땅에 가까운 곳에 살기 위해 속초 청호동에 터를 잡은 함경도 사람들은 그 때부터 바다일 밭일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집도 간이식으로 지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 휴전선이 생기고 마음대로 오갈 수 없게 되자 실향 마을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청호동, 지붕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골목을 이룬 곳. 어릴 때 뛰어놀던 그 골목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망향의 세월 50여 년, 그리움에 사무친 청호동 사람들의 마음이 꽃으로 피어난다면 아마도 저리 붉은 꽃을 닮았을 것이다.

날아갈 것 같은 파란 하늘을 이고 걷는 오래된 골목길은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려 마음을 풋풋한 초록빛으로 물들인다.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 딛는 걸음도 가벼워진다. 어찌 보면 이곳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고향의 원형을 닮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 식당 간판 아래 냉면과 순대가 전문이라는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가 순대를 시켰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아바이순대, 오징어순대로 유명한 마을 아니던가. 구수한 순대 맛이 입맛에 맞는다. 막걸리도 집에서 직접 담근 막걸리란다.

식당 주인 아주머니 또한 1951년에 이곳에 터를 잡았다. 살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고, 처음 시작한 일이 냄비장사였다. 한 해  두 해 지나고 고향사람들이 그리워 흩어져 살던 고향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휴전선이 그어졌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사라졌다. 꿈에서 나마 고향을 본 날이면 바다에 나가 북쪽 하늘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며 사람들이 모이고 마을 모습이 갖춰질 무렵 아주머니는 순대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옛날에 고향에서 먹던 그 맛 그대로 함경도식 순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70세를 훌쩍 넘긴 아주머니의 얼굴에 골 깊은 주름이 녹록하지 않았던 세월의 무게를 얘기해주고 있었다.
 

청호동, 아바이마을 앞 바다
 
청호동 앞 바닷가로 발길을 옮겼다. 빈 파라솔만 백사장을 지키고 있고 몇몇 사람들이 백사장을 거닐고 있었다. 50년 전 텅 빈 백사장에 서서 그리움 가득한 바다만 바라보았을 그 사람들의 모습이 백사장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에 겹쳐진다. 못 다 부른 망향의 노래, 그리운 세월을 묻어둔 바다가 시퍼렇게 멍들어 뒤척이고 있었다. 


[여행정보]

<길안내>
자가용
영동고속도로 - 동해고속도로 양양․속초방면 - 7번 국도 - 속초 고속버스터미널 앞 사거리에서 청호동 방향으로 직진 - 청호대교 - 금강대교 - 영금정(동명항)

대중교통 속초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도착. 터미널 앞 시내버스 정류장(길 건너지 말고 터미널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가다보면 시내버스정류장이 나온다)에서 1번, 7번, 9번 시내버스를 타고 영금정 입구에 내려달라고 하면 된다.

<음식>
영금정 주변에 도루묵집이 많다. 구이와 찌개 조림 등으로 먹는데 개인적으로 도루묵조림이 입맛에 맞는다. 동명항 회타운에서 각종 회를 맛본다. 청호동 아바이마을에 가면 순대국과 냉면, 막걸리가 맛있는 단천식당(033-632-7828)이 있다. 청호동 갯배 타는 곳에 생선구이집도 유명하다.

<숙박>
장사동에 한화리조트 등이 있다. 속초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약 400m 거리에 속초해수욕장이 있는데 그 주변에 민박이나 펜션이 많다.

*속초여행문의 : 속초종합관광안내소 033-639-2690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4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