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에서 30여년간 근무한 뒤 지난 2005년 정년퇴직한 임병량씨(63). 그는 요즘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라며 연신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주섬주섬 명함 두개를 건넸다. 평생 농협 명함만 품고 살다가 지금은 두세개의 명함을 들고 다니니 기분이 묘하다는 그는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에 큰 기쁨을 느낀다"며 미소 지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비결을 묻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여유로운 '인생2막'을 시작할 수 있는 비결을 들려줬다.
 
"눈높이를 낮춰야 해요. 은퇴 전에 몸담았던 회사와 비교해 높은 연봉을 요구하면 새로 취업할 곳의 면접관들이 부담스러워 하거든요. 정년퇴직 후 자신의 몸값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요. 그리고 지금은 사회에 봉사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진_류승희 기자
 
임씨는 농협에 근무할 때보다 은퇴 후 더 열심히 산다고 말한다. 멋진 인생2막을 누리기 위해 지금도 펜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은퇴 후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한 덕에 공인중개사와 한자2급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한자1급 자격증 시험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컴퓨터를 배우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인터넷 검색은 물론 파워포인트도 능숙하다. 과거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이 파워포인트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 그때부터 노력한 결과다.
 
노력 만큼 그가 맡고 있는 분야도 다양하다. 은퇴 직후 1~2년간 후배가 운영하는 건설회사 이사직에 근무하면서 조언자 역할을 했고 고용노동부 고용지원센터 취업상담사로 일하기도 했다.
 
지금은 '방과후학교'를 운영하는 회사의 관리직을 맡아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의 업무일정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또 일주일에 한두번 아이들에게 한글과 한자를 가르치는 일도 그의 주된 업무 중 하나다. 뿐만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노인의 하루일과를 모니터링 하는 일도 3년째 맡고 있다. 노인의 여가생활을 비롯해 그들이 불편해 하거나 노인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등을 상담한 후 이를 국가인권위에 보고하는 일이다. 국가인권위는 임씨의 보고서 등을 토대로 노인복지를 위해 개선해야 하거나 추진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수십여번 면접 실패로 깨달은 값진 결실
 
임씨는 정년퇴직 직후 노인들의 일자리 벽이 얼마나 높은지 새삼 깨닫게 됐다. 세상의 편견이 희망보다 절망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취업을 위해 은퇴자협회와 노인취업박람회, 정부기관 취업사이트 등 다양한 곳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스스로 찬란했던 과거를 버리자 비로소 그를 보는 면접관들의 시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퇴직 직후 1년간 아내와 여행을 다니며 여가생활을 즐겼어요. 그동안 열심히 일한 덕분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은 전혀 없었죠. 그런데 1년이 지난 후 더 이상 할 일이 없더라고요. 노는 것도 지치고요. 그래서 다양한 기업에 이력서를 제출해 재취업의 문을 두드렸어요. 하지만 현실은 절망이었습니다. 15개사에 제 이력서를 넣었는데 거의 다 탈락했어요."
 
그는 은퇴 전 농협에서 승승장구하며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10년간 농협은행 지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농협을 벗어난 그는 한없이 작은 60대 남성에 불과했다. 정년퇴직한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력서에 연봉을 적는 칸을 빈칸으로 남겨뒀다. 돈보다는 일에 대한 열망이 더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울러 자신이 준비된 사람이라는 것을 면접관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연간 1억원을 벌었던 사람한테 한달에 고작 20만원을 주겠다고 하면 누가 가겠습니까. 하지만 돈에 집착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일이 없어 집에만 있으니 더 빨리 늙는 것 같았고 심신도 지쳤거든요. 그래서 돈보다는 성취감과 보람된 일을 찾는데 주력했죠."
 
일을 하면서 젊은 사람과 소통하는 일도 그가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다.
 
"방과후학교에서 하계휴가를 떠난 적이 있어요. 참여한 교사 대부분이 20~30대였죠. 저는 그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행복해요. 제가 젊어지는 것 같고 그들의 세상에 속한 것 같아 짜릿해요. 내가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건 돈보다도 더 소중한 선물이죠.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그동안 많은 면접에서 수차례 실패한 경험이 알려준 값진 결실이기도 해요.(웃음)"
 
◆실버세대 늘어나는데 복지는 '제자리'
 
임병량씨는 재취업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노인복지가 얼마나 밑바닥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업에서 연령이 높으면 무시하고 차별하는 경우가 많아요. 말로는 노인복지를 확대한다고 하는데 체감온도는 낮아요. 갈 곳도 없는데 지하철을 타거나 경로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보면 처음에는 답답했는데 지금은 이해가 돼요. 그들을 탓하기보다는 그들을 방치하는 정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노인복지 시스템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앞으로 고령화사회가 더욱 가파르게 진행될 텐데 그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제자리걸음이라는 지적이다. 그들이 사회에서 존경받고 국가에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많은 고민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의 그의 생각이다.
 
"은퇴자나 노인에게 필요한 것은 생색 내듯 제공되는 무료급식과 소액의 차비가 아닙니다. 그들이 더 자신감을 갖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도록, 또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줘야 합니다. 정부와 지자체, 전문가들이 나서서 좀 더 현실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작은 소망이기는 하지만 그런 대안을 만드는데 저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5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