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더 공부해야 됩니다!" 지난해 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승진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그리고 1년여 뒤 이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부회장 승진을 '승인'한 것이다.
삼성의 '이재용 시대'가 열렸다. 지난 5일 발표된 2013년 사장단 인사에서 이재용 사장은 사장 승진 2년만에 부회장 직함을 얻었다. 그동안 라이벌 관계의 현대자동차와 신세계가 '후계자' 정의선-정용진을 부회장 자리에 올려놓은 것에 비하면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의 그룹 경영권 승계 퍼즐이 비로소 맞춰졌다.
사실 이재용 신임 부회장의 승진 여부는 이번 연말 재계 인사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대선을 앞두고 재벌 총수의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이건희 회장마저 11월 말 열린 취임 25주년 기념식에서 아들의 승진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던 터라 일각에선 이 사장의 승진이 올해도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악재 속 실적·광폭행보 '주목'
하지만 이재용 사장의 승진은 곧 현실화됐다. 삼성 측은 "이 부회장이 글로벌 경영감각과 네트워크를 갖춘 경영자로서 경쟁과 협력관계 조정, 고객사와의 유대 강화 등을 통해 스마트폰·TV·반도체·디스플레이 사업의 글로벌 1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승진 배경을 밝혔다.
삼성의 말마따나 이번 승진에는 글로벌 경쟁사들이 심각한 경영난을 겪는 가운데서도 삼성전자의 경영 전반을 지휘하며 창립 이래 최대성과를 올리는 데 기여한 이 부회장의 공로가 인정됐다. 실제 삼성전자는 올 3분기 매출 52조1800억원, 영업이익 8조1200억원으로 사상 최대실적을 거뒀다.
실적 외에도 그는 올 들어 경영자로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해외 최고경영자(CEO)와의 만남을 통해 경영보폭을 넓혔고 세계 최대 부호부터 중국 정부 고위 관료, 자동차·태양광·식음료업계 CEO 등과의 교류에도 앞장섰다.
지난해 10월 고 스티브 잡스 애플 공동창업자의 추모식에 참석한 것을 비롯해 인텔·GM·토요타·지멘스·폭스바겐 CEO를 잇따라 만났고 피아트-크라이슬러 그룹의 지주회사인 엑소르 그룹의 사외이사로 선임되면서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올 6월에는 시진핑 총서기와 함께 향후 중국을 이끌 리커창 부총리와 면담을 가졌으며 최근에는 세계 최대 부호인 카를로스 슬림 텔맥스텔레콤 회장과도 미팅을 가졌다. ◆이상훈·이인용 등 '이재용 라인' 전진배치
이재용 부회장의 승진을 둘러싸고 삼성이 '포스트 이건희 시대'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승진 자체의 상징성도 있지만, 소위 '이재용 라인'의 인사들이 전진 배치된 점 또한 크다.
이미 지난 6월 이 부회장의 '경영멘토'로 불려온 최지성 부회장이 삼성전자에서 미래전략실로 자리를 옮긴 데 이어 이번 인사에서도 경영 전면에 등장한 것이 눈에 띈다.
우선 삼성전자 김종중 DS(부품)부문 경영지원실장은 미래전략실 전략1팀장(사장)으로 자리를 바꿨다. 김 사장은 '차차기 미래전략실장감'으로 평가되는 인물로, 미래전략실이 그룹의 컨트롤타워이면서 삼성의 전계열사를 아우르는 핵심조직인 만큼 향후 이 부회장의 측근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미래전략실 전략1팀장에서 삼성전자 완제품(DMC) 경영지원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상훈 사장 역시 대표적인 '이재용의 남자'로 통한다. 그룹 내 '재무통'으로 지난 1982년 삼성전자 경리과에 입사한 이후 구조조정본부 재무팀을 거쳐 2009년 삼성전자 사업지원팀장으로 승진한 그는 부사장 시절 이미 삼성전자 등기이사에 올라 김인주 전 삼성전자 상담역 이후 최초로 부사장급으로서 이사회에 참여하는 등 존재감을 알린 바 있다.
이인용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팀장의 사장 승진도 주목받는 인사내용 중 하나다. 이 사장은 MBC 공채 기자 출신으로 뉴스데스크 앵커 활동을 하다 지난 2005년에 삼성전자로 옮겨 화제를 낳았다. 이 부회장과는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문이다.
◆신경영 20주년 맞아 '비전' 실천 기대
'장남의 부회장 선임'이라는 결단을 내린 이건희 회장의 이번 선택을 놓고 업계에서는 이 회장이 지난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한 지 만 2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는 만큼 삼성그룹의 미래를 준비하고 새로운 밑그림을 그리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이재용 부회장을 중심으로 삼성의 새로운 비전 수립을 이뤄내고 삼성전자 등 주요 계열사의 책임경영을 가속화시키겠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인사에서 이 회장의 자녀 중 이부진 호텔신라·삼성에버랜드 사장과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은 승진자 명단에서 빠진 채 유일하게 이재용 부회장만 포함시킨 점도 이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경영승계 작업이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오기에 충분하다.
일각에서는 이부진 사장을 승진인사에서 제외한 것은 이재용 부회장과 경쟁구도를 형성하는 것으로 비쳐질 소지가 있다는 점을 이 회장이 고려했을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성그룹 측은 "이재용 사장의 부회장 승진은 삼성전자의 사업을 더욱 폭넓게 하겠다는 의미이지 경영승계와는 관련이 없다"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 재계 '3세 부회장 시대' 도래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함에 따라 재계의 '3세 부회장 시대'도 활짝 열렸다. 대표적인 '3세 부회장'은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다. 나이로 보면 정의선 부회장(42세)이 1970년생으로 가장 어리고, 이재용 부회장과 정용진 부회장은 1968년생으로 동갑내기(44세)다.
이들 중 가장 빨리 부회장에 오른 이는 정용진 부회장이다. 1995년 신세계백화점 이사를 맡았던 그는 2006년에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11년 만이다. 반대로 이 부회장은 1991년 삼성전자 부장으로 입사한 이후 21년 만에 부회장을 달았다. 2001년 경영기획팀에서 경영수업을 받았고 2003년 경영기획팀 상무, 2007년 전무, 2010년 부사장에 올랐다.
정의선 부회장은 1994년 현대모비스(구 현대정공) 자재부 과장으로 입사한 이후 15년 만인 2009년에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현대차 구매실장 등을 거쳐 2005년 기아차 사장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경영전면에 등장한 케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