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따분한 일상을 떠나 잠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픽션의 주인공으로 감정이입이 되고 싶은 순간, 우리는 가까운 영화관을 찾는다.
 
일상과 닮은 공간이 주는 안온함에서 내 삶의 리얼리티를 타인의 시점에서 관찰하는가 하면 극도의 환희와 공포감, 슬픔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때때로 미술품은 시각과 청각을 통해 감정을 증폭시키는 120분의 러닝타임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해주는 영화의 재료로써 등장한다.
 
스크린을 지나가는 휘황한 영상을 더욱 화려하고 품격 있게 가꿔주는 소재로, 주인공의 감정이 이입되거나 결말을 예측하게 하는 복선으로, 영화를 감싸 안는 묘한 기류를 상승시키는 증폭제로, 영화 속 미술품은 스토리 안에서 다양한 무게를 갖게 된다.
 
◆영화의 속 미술품으로 읽는 영화 전반의 메시지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아우르는 미술작품의 주된 역할은 스토리의 기저에서 끊임없이 관객에게 상상의 흔적을 남기게 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꿈속에서 생각을 훔치며 숨 가쁘게 시공간을 따라잡게 하는 영화 <인셉션>에는 일본의 풍속화인 '우끼요에'가 등장한다.

영화가 시작될 즈음, 주인공 코브의 배경에 등장한 '우끼요에'는 장자의 호접지몽처럼 꿈과 현실의 의미를 묻는 듯 찰나의 꿈같은 삶의 덧없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섬뜩한 추리영화 <올드보이>에서는 벨기에 화가인 제임스 앙소르의 '슬퍼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어느 평범한 날 갑작스럽게 납치돼 독방에 갇히게 된 주인공 오대수의 방에 걸린 '슬퍼하는 남자' 밑에는 '웃어라, 모두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만 울 것이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어 묘한 불안감을 드러낸다.
 
기괴한 주름으로 덮여 웃는 것인지, 고통받고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그로테스크한 인물화인 '슬퍼하는 남자'는 이후 영화 속 오대수의 얼굴과 오버랩되기도 하면서 영화 전반의 음습한 기류를 한층 고조시킨다.
 
파격적인 노출과 강렬한 스토리로 이목을 집중시켰던 영화 <하녀>의 극중 팽팽한 감정의 긴박함을 고조시킨 작품은 김재관 작가의 'MYTH OF CUBE'다. 수십억원대의 작품으로 채워져 마치 갤러리를 연상케 하는 훈의 저택에 걸려있는 김재관 작가의 'MYTH OF CUBE'는 허락되지 않은 격렬하고 은밀한 관계를 이어가는 하녀의 팽팽한 심리를 드러내는데 주력한다. 스크린을 지나가는 김재관 작가의 작품 20여점은 저택 내부의 불편하고 타이트한 공기를 담아내며 배우들의 열연과 함께 절제된 미장센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후 임상수 감독은 <돈의 맛>에서도 돈을 최상의 가치로 꾸려가는 재벌가 내부의 음울한 분위기를 담아내는 역할로 미술품을 대거 등장시킨다. 돈으로 질척이는 끈적한 재벌가 내부에는 홍경택, 노재운, 고산금, 아르망 등의 작품이 지나쳐간다. 특히 백금옥 여사가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윤회장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로 꼽히는데, 윤회장의 시신 위에는 홍경택의 '레퀴엠'이 죽음을 향한 진혼곡처럼 공간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연출한다.
 
재벌가 판타지 속에 뛰어든 영작의 심리를 줄곧 따라가며, 결국 '돈'의 가치 앞에 무력하게 스러지고 마는 관객의 서사는 참혹한 리얼리티 그 자체의 모습이다. <돈의 맛> 속의 미술품은 결국 그 자체로 돈의 권력을 드러내는 소재이자, 돈의 참혹한 이면을 드러내는 메시지로 영화에 깊은 레이어드를 더한다.
 
영화 <밤과 낮>을 아우르는 작품은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다. 팔다리도 없는 여성의 누드가 적나라하게 표현돼 오랜 시간 'X'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세상에 몸을 숨겨야했던 작품 '세상의 기원'. 극중 가난한 화가로 묘사되는 성남은 대마초 혐의를 피하기 위해 파리에서 생활하며 한국에 있는 부인과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파리의 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지속한다. 밤과 낮이 바뀐 도시에서 생활하며 사랑과 현실의 이중성을 전하는 <밤과 낮>은 마주보기 불편한 리얼리티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세상의 기원'과 닮은 모습이다.
 
김기덕 감독은 영화 <나쁜남자>와 <파란 대문>에서 모두 에곤 실레의 작품을 드러냈다. 에곤 실레의 작품은 마치 윤락업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투영하는 듯 특유의 음란함과 천진함을 고스란히 내포하며 무력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영화 속 미술품은 유명화가의 삶 자체를 소재로 한 전기영화에서만 풍성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술품이 영화의 일부로 캐스팅된 듯 스토리 전반을 아우르는 주제를 작품의 메시지와 일체화하며 내밀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미술품은 작품 내부의 메시지와 결부돼 영화의 주요하고 은밀한 열쇠로 작용하지만, 그 역할이 직접적이기보다 눈에 띄지 않는 기저에 깔려있기에 더욱 매력적이다.
 
한순간 자취를 남기고 관객으로 하여금 간접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 속 미술품. 은막을 지나가는 미술품을 발견함으로써 영화를 아우르는 주요한 분위기를 읽어가는 것 또한 영화를 감상하는 섬세한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눈으로 전해지는 영화의 배경음, 미술품의 우회적인 소리에도 한번쯤 촉수를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 프로필
마이애미·뉴욕·퀼른·워싱턴·런던·도쿄·베이징 등 국내외에서 100여회의 전시를 가졌으며 2011년 청작미술상을 수상했다. 화장품 브랜드 미샤와 한정판 라인 출시, 소녀시대 의상 콜라보레이션 등 갤러리의 문턱을 넘어 문화 전반에서 관객과 만났다. 주요 저서로는 <스물아홉 김지희, 그림처럼 사는>, <스물아홉 김지희, 삶처럼 그린>(2012) 등이 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8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