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젠지(中禪寺)호수와 시라네산(白根山). 늦봄인데도 잔설을 봉우리에 이고 있다. 동쪽으로 난타이산(男體山)과 마주하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늦봄, 여자의 마음을 가장 심란하게 만드는 때이지요. 따뜻한 날씨에 부드러운 바람이 중년의 여심(女心)을 간질이는데, 우연히 '닛코'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습니다. 닛코(日光)의 명성은 일찍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열도 일본을 대표할 만한 풍광과 역사적 유적이 많기로 해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곳입니다.



지금처럼 가보고 싶은 곳이 생기면 그 곳의 영상이 뇌 깊숙이 침입해 자리 잡기 시작하고, 마침내 일을 저지르게 합니다. 30년 세월을 함께해온 친구들을 충동질 합니다. "아, 꿈같은 봄날이여! 짜증과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멀리 바다건너 닛코로 가보자." 유혹의 속삭임에 순간 마음을 빼앗긴 열 명의 친구가 모여 드디어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38㎞가량 이어지는 삼나무가로수길 닛코가도. 네 차례 조선통신사 일행이 이곳을 지났다.
부처님오신날 이른 아침, 닛코국립공원의 관문 이마이치(今市)시에서 먼저 반기는 것은 삼목 숲길입니다. 삼(杉)나무는 40m까지 곧게 자라는 일본 특산종입니다. 전하는 얘기로는 도쿠가와(德川)가의 가신(家臣) 마츠히라(松平)와 그의 아들이 1625년부터 20수년간에 걸쳐 이 가로수길을 조림했다 합니다. 400년이 지난 지금에는 하늘을 찌를 듯 당당하게 늘어서 있는 수많은 거목들이 그 긴 세월을 무언으로 웅변하고 있는 듯합니다. 특히나 이 길은 조선통신사일행이 세 차례나 지나갔던 곳입니다. 그 옛날 이들은 어떤 상념을 하면서 어떤 표정으로 이 길을 걸어갔을까요. 한양에서 이곳까지 약 6개월이 걸려 도착했다 합니다.



조선통신사 이마이치객관터(今市客館跡) 기념비(상)와 건립을 주도한 야나기하라(柳原) 선생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시고 닛코 국립공원 구석구석까지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안내해 주신 분이 닛코미술관장인 야나기하라 가즈오키(柳原 一興) 선생입니다. 닛코에서 태어나고 닛코를 떠나본 적이 없다는 야나기하라 선생은 '닛코조선통신사연구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연구는 이마이치 조선통신사객관터(今市客館跡) 기념비 건립으로 이어졌는데 건립모금운동을 시작하자마자 순식간에 700만엔(한화 약 7억원)의 기금이 모였다 합니다.



이마이치의 객관은 막부에서 통신사일행을 영접하기 위해 지은 임시 숙소입니다. 일행이 도착하기 전해부터 판옥(板屋) 수백여 칸을 전부 새로 지었는데 목재를 에도(江戶)에서 운반해왔다 합니다. 당시 건축비로 만량(萬兩)이 넘게 들었다 하는데요,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10억엔(한화 약 100억원)이 넘는다 하니 조선통신사가 당시의 막부에 얼마나 중요한 사절이었는지 짐작케 합니다. 통신사가 돌아가면 객관을 해체해서 그 재목을 현지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기에 통신사일행이 오는 해는 이마이치시의 살림이 넉넉해졌다고도 합니다. 야나기씨의 설명을 듣는 동안 지금까지 네 차례 닛코를 다녀간 통신사 일행의 모습이 눈앞에서 하나둘씩 스쳐 지나갑니다.



현재의 일본인과 일본문화를 압축해놓은 듯한 도쇼구(東照宮)의 세 원숭이(見猿, 聞猿, 言猿)
신사(神社)에서 만난 기품 있는 한 일본부인(중앙)과 친구들. 산사의 다회(茶會)를 마치고 나오던 부인은 사진 요청을 흔쾌히 승낙하고 내내 웃음으로 응해주었다.
이에야스(家康)의 묘와 사당이 있는 도쇼구(東照宮), 이황산신사(二荒山神社) 등의 역사유적지를 둘러본 후 해발 1274m 고지에 있는 츄젠지(中禪寺) 호수로 향했습니다. 도중의 풍광가운데 가장 경이로운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산길도로입니다. 이 도로는 오르막, 내리막굽이가 모두 48개라 하여 이로하자카(伊呂波坂)라 불립니다. 서서히 굽이치며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문자 그대로 아홉 번 꼬부라진 양의 창자와 같습니다. 마치 파란만장한 인생의 여정과도 같은 것일까요.



산정에 다다르니 드넓은 호수위로 높고 낮게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누군가가 교묘하게 구성하고 배치한 듯 드러나야 할 것은 드러나고, 가려야 할 것은 가려지고, 숨어야 할 것은 숨어있는 '스스로 그러한'(자연·自然) 경관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눈길 닿는 대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옅고 진하게, 혹은 멀고 가깝게 주위의 만물이 모두 호수에 담겨있습니다. 조금만 이동하여도 물빛이 바뀌고 그 속에 담긴 구름과 산의 초목도 바뀌어 집니다.



호수의 여신이 머리를 감는 곳인가요? 호수가 쏟아내는 물이 장엄한 게곤(華嚴) 폭포로 이어집니다.
츄젠지호에서 최대 장관은 뭐라 해도 게곤(華嚴) 폭포를 꼽아야 합니다. 거대한 용이 하늘로 솟구쳐 춤을 추듯이 그 기세가 자못 웅장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옥처럼 날리는 포말과 날아오르는 하얀 장막만이 보일 뿐입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짙푸른 녹음사이로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작은 산새들이 춤추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야나기 선생은 그 새의 이름이 '츠바메'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동쪽의 난타이산(男體山). 호수와 하나가 되어 손에 잡힐 듯합니다.
호숫가에 앉아 아득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덧 사위의 인적이 끊기고 재잘대던 새들도 자취가 묘연한 듯합니다. 더없이 아득한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뿐인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때 호수와 산위로 옅은 안개가 자욱이 깔리더니 멀리 보이는 하늘과 산과 호수와 구름이 하나가 되어 가장 아름다운 백색의 화면을 만들어 갑니다. 닛코의 진정한 풍광이 산허리의 붉은 꽃들처럼 느릿느릿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생애에 이 세상의 좋은 풍경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밟을 기회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순간 발밑에 펼쳐져 있는 푸른 호수, 파랗게 펼쳐진 하늘, 그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느낌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산정에는 부드러운 바람만이 스칠 뿐 닛코의 자연은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 글·사진=이경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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