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의 염리2구역 재개발지구. 이 지역은 지난 2013년 8월 이주와 동시에 철거작업이 진행된 곳이다. 무너져내려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집들 사이로 각종 쓰레기와 깨진 유리조각 등이 나뒹굴어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이곳에 아직 10여명의 주민이 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최근 이곳에서 기자와 만난 철거민 박모씨(60·여)는 폐허가 된 한곳을 가리키며 자신이 살던 집이 있던 자리라고 소개했다. 지난해 12월 세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난 박씨는 벌써 9개월째 신설동에 있는 1평 남짓한 조카의 가게에서 아들과 지낸다고 했다.
그마저도 더 이상 조카에게 염치가 없어 올 겨울에는 집터 옆에 천막을 치고 나와야 할 판이란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던 2011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생존마저 위협받는 떠돌이 신세가 될 줄은 몰랐다며 박씨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살던 집터를 찾은 박씨. ◆빈손으로 내쫓겨 떠돌이 신세가 되기까지
인근에서 수선가게를 운영하던 박씨에게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재개발이 본격화되면서부터다. 2013년 3월 조합에서 주민 이주를 종용하기 위해 고용한 용역업체 직원들이 밤낮으로 박씨를 찾아오기 시작한 뒤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면서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이 여파로 지난해 2월부터 임대료와 공과금을 체납했다. 1년여 동안은 보증금 500만원을 월세로 까먹으며 근근이 버텼다. 결국 박씨는 지난해 말 거리에 빈손으로 내몰렸다. 현행법상 이주비 보상을 받기 위한 기준일(구역 지정을 위한 공람공고일 3개월 전)이 지난 후 전입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박씨의 딱한 사정을 들은 이웃 주민이 자신의 집으로 이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한 조각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집 역시 건물명도 강제집행 대상인 터라 조합과 용역업체 직원들이 박씨를 막아섰다.
당시 용역업체 직원들은 그 집의 창문을 모두 깨고 현관문을 떼어냈다. 졸지에 오갈 곳을 잃은 철거민이 빈집에 거주하는 사례가 종종 있어 일부러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폐허를 만든 것이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이 일이 있기 몇달 전 서울시는 강제철거 과정에서 벌어지는 비인권적 관행을 타파하겠다며 '주거시설 등에 대한 행정대집행 인권매뉴얼'을 마련해 시행했다. 박씨는 시가 인권침해라고 규정한 대부분의 항목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는 주거시설 철거에 앞서 소유자와 점유자 등의 권리인 충분한 협상의 기회와 정보 제공, 충분한 사전고지 등을 받지 못한 채 겨울철에 쫓겨났으며 철거과정에서 인권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거현장에 입회해야 하는 공무원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특히 대체 주거를 마련할 수 없는 소유자 등이 주거와 생계대책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은 아무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다. 박씨가 집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수개월 동안 조합과 용역업체 직원들에게 들었던 말은 "당장 나가"라는 게 고작이었다.
자신이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불과 얼마 전 일이다. 하지만 마포구는 "박씨가 현재 신설동에 거주하는 만큼 관할이 아니어서 지원은 어렵다"며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서울 마포구의 염리2구역 재개발지구. ◆한겨울 바람보다 차가운 시선을 견디며
매뉴얼을 통해 헌법과 유엔(UN) 사회권규약 등에서 규정하는 생명권과 주거권, 안전에 대한 권리 등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도시개발법 등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의 실행력을 갖추려 했다는 시의 거창한 설명이 민망할 정도다.
이는 시에서 매뉴얼을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 2012년 11월15~28일 넝마공동체가 강제철거되던 그날의 새벽 이후에도 변한 것이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는 방증이다. 시의 매뉴얼이 강제력이 없어 한계가 있다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강제퇴거금지법은 개발 논리에 막혀 3년째 국회에서 표류 중이다. 그동안 원주민 이주 문제, 전면적인 철거·개발 방식 등 1960~1970년대에 고착된 도시개발의 고질적 문제가 반복되며 박씨와 비슷한 철거민을 양산했다.
개발 이후 원주민의 재정착이 현저히 낮다는 점은 정부 주택정책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시에 따르면 재개발 원주민 재정착률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세입자에게도 임대주택 입주자격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사회취약계층인 철거민이 감당할 수 있는 분양가가 아니다.
실제 입주자들의 요구소득은 3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력이 취약한 철거민은 더 열악한 환경의 주거지로 밀려나고 그 자리를 경제력 있는 계층이 차지하는 형국이다. 박씨는 "정부가 돈 있는 사람만 국민으로 보는 것 같다. 우리도 국민이다"고 가슴을 쳤다.
그러면서 그는 "올 겨울 천막에서 쪽잠을 자는 것보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주거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자신을 돈을 더 받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으로 보는 대중의 차가운 시선이 구조적인 문제들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
박씨는 "6년 전 용산참사를 지켜봤을 때만 해도 저렇게까지 농성을 해서 그들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가에 대해 무관심했고 오히려 부정적인 견해에 가까웠다"면서 "지금 본인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씁쓸해했다.
그러나 그는 대중의 동정과 연민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손사레를 쳤다. 박씨는 "전국 개발 현장에서 제각각의 사연과 이유로 떠나지 못하는 철거민이 적지 않다는 현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봐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