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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은행 IT전산센터에서 일하는 김 과장은 월말이나 분기말 결산일이면 야근에 시달린다. 전산이 과부화될까 불안해하며 밤 늦게까지 근무하기 일쑤다. A은행은 최근 직원들의 근무복지 처우개선을 위해 유연근무제를 도입했으나 특정 전산시스템을 관리하기 위해 자리를 지켜야 하는 김 씨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다. 

# B은행 본점에서 근무하는 박 대리는 아침 7시면 사무실에 출근한다. B은행이 오후 6시에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지는 ‘컴퓨터 오프제’를 도입한 후 출근시간이 빨라진 것이다. 해야 할 업무는 계속 늘어나는 데 컴퓨터 작동시간은 제한되다 보니 B은행은 오히려 출근을 서두르는 직원들이 늘었다.


박 대리는 “근로시간만 줄이면 오히려 업무를 이른 시간에 처리해야 하는 과부하 현상이 일어난다. 업무량 조절과 인력 충원없이 근무시간만 줄이는 정책은 조기출근, 휴식시간 축소 등 부작용을 일으킬 것”이라고 토로했다.

국회가 오는 7월부터 근로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워라밸' 열풍이 전세계적으로 불면서 우리나라도 입법화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은행권은 근로시간 단축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미 유연근무제, 퇴근시간에 사무실 일괄 소등, 컴퓨터 오프제 프로그램, 휴가제도 등을 운영해 '주 52시간 이하 근로'가 보편화됐다는 이유에서다.

은행권에 따르면 시중은행의 주당 근로시간은 40~45시간 내외다. 주 5일을 기준으로 오전 9시 출근해서 오후 5시~6시에 퇴근했을 때 시간이다. 하지만 빨라진 퇴근만큼 일찍 출근하거나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에도 일을 해야 하는 ‘꼼수’와 편법이 나타나 근로시간 단축의 실효성이 미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업은 특례업종 제외, 근로시간 ‘꼼수’ 없애야

은행권은 각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업무 성격상 초과근무가 불가피한 조합원에 대한 별도의 지원 방안 마련을 모색 중이다. 금융업종이 근로시간 단축법 ‘특례업종’에서 제외돼 장기간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적장치가 마련됐으나 업무 특성상 초과근무가 불가피한 직원들은 오히려 역차별을 받게 됐다.


보통 기업대출을 전담하는 직원들은 영업점포 시간과 관계없이 거래처에 따라 초과근무를 하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본점 직원도 야근이 비일비재하고 IT전산센터 직원은 전산시스템 교체 때는 며칠씩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허다하다. 업무량이 줄지 않으면 근무시간 단축법이 시행되더라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직원들이 나타나는 셈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은행 건물 불이 꺼지면 컴퓨터가 필요없는 회의나 잔업을 밖에서 하는 직원들을 종종 볼 수 있다”며 “최근 은행들이 점포를 줄이면서 상시 구조조정도 단행하는 데 지점실적이 낮아질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단축된 근무시간을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고 꼬집었다.

최근 핀테크 열풍으로 은행 지점을 찾는 고객이 줄었지만 스마트폰뱅킹과 온라인뱅킹에서 하는 거래와 투자 등을 관리하는 데는 여전히 은행원의 노동이 필요하다.

한국경제연구원이 2015년 발표한 ‘근로시간 단축의 비용 추정’ 보고서에 따르면 근로시간 단축으로 국내 기업이 추가 부담해야 할 비용은 연간 12조3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기존 근로자 임금 추가분이 약 1조8000억원, 추가 채용한 인원의 인건비 9조4000억원, 채용에 드는 간접비용 2조7000억원이다. 기업의 추가비용이 늘어나다 보니 기존 근무자에게 편법을 동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근로시간 단축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선진국처럼 재량성이 높은 업무에 대해 적용을 제외하는 변경근로제를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근로자에게 예외조항을 두고 추가 근무하는 근로자에게 추가 수당을 주자는 얘기다. 반대로 관리직과 행정직, 전문직, 외근영업직, 컴퓨터 전문직 등 일부 직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에게는 시간 외 근무수당을 주지 않아도 되는 장치로 ‘화이트칼라 이그젬션(면제)’을 둘 수 있다.

이는 미국의 근로제도로 연간 임금소득을 받는 근로자의 경우 연장근로수당과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는다. 주로 근로시간에 비례해 업무의 성과나 질을 측정하기 어려운 화이트칼라를 대상으로 시행한다.

독일과 영국도 평균 근로시간을 초과하지 않는 이상 노사가 자율적으로 근로시간을 배분할 수 있다. 프랑스와 포르투갈, 핀란드, 일본, 미국 등의 경우에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1년 단위로도 설계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최대 3개월 단위의 탄력적 근로시간제 설정이 가능하지만 절차적 요건이 까다로워 제도의 활용도가 낮은 편이다.

이승길 아주대 법학전문대 교수는 “근로시간 단축제가 근로자를 보호하는 좋은 입법이지만 기업이 제도에 발맞춰 나가기에 한계가 있다”며 “4차 산업 발전으로 근로자의 근무행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직군별로 적합한 근로시간을 어떻게 운영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