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제주 '함덕쉼팡'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의 따뜻한 손편지로 시작된 '상생'


돌담 너머 동백꽃이 탐스럽다. 겨울을 견딘 동백꽃은 땅에 떨어져서도 곱다. 동백은 오랜 세월 누군가의 가슴에서도 숨죽여 피었을 것이다. 동백은 제주의 봄이다. 제주시 조천읍 올레길 19코스를 찾았다. 서우봉에서 내려오는 길목, 함덕해변의 봄바람은 제법 찼다. 제주의 바다는 특유의 청록색 빛을 더했다. 성난 파도는 갯바위를 집어삼켰다.


북촌의 너븐숭이기념관에서 길을 잡았다. 서우봉도 넘었으니 쉴 때도 됐다. 유채꽃처럼 노랗게 옷을 입은 조그만 식당이 눈에 띈다. 함덕쉼팡이다. 쉼팡은 쉼터다. 길을 가는 사람이 잠시 쉴 수 있도록 길 가장자리에 넓적한 돌 따위를 놔둔 자리를 가리킨다. 식당 난로에 제주 바람에 언 몸을 녹였다. 낯선 여행지, 쉼터를 제대로 찾은 것 같다.

지난 7일 함덕해변과 서우봉 전경. /사진=박정웅 기자
지난 7일 함덕해변과 서우봉 전경. /사진=박정웅 기자

◆자연을 담은 제주의 맛집

그동안 여행기자로 일하면서 맛집에 대한 기사를 단 한줄도 쓴 적이 없다. 겸연쩍지만 남들이 말하는 맛의 고장 출신이어서 타지에서 맛에 대한 감흥은 없는 편. 또 오랫동안 집밥에 길들여진 탓도 있겠다. 조미된 메뉴에 앞서 원재료를 챙기는 편이다. 하지만 함덕쉼팡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문어탕면의 맛이 좋았기 때문이다. 돌문어가 싱싱해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쫄깃’ 자체지만 질기지도 않다. 면은 생면인지 목넘김이 좋다. 조금 얼큰한 국물까지 모조리 비웠다.


함덕쉼팡은 단출하다. 테이블 대여섯개가 고작이다. 그런데 주방에 호텔 셰프가 있다. 이상하다 싶어서 사정을 물었다. 박영준 제주신라호텔 셰프다. 그는 또 다른 셰프와 해산물을 점검하고 있었다. 함덕쉼팡의 영업주인 김은정씨다. 박 셰프는 김씨를 ‘누나’라고 했다. 친누나는 아니지만 가까운 이웃을 가리키는 ‘삼촌’처럼 친근함의 표현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누나 앞에서 어리광까지 부린다.

함덕쉼팡은 호텔신라의 제주지역 상생 프로젝트로 탄생했다. ‘맛있는 제주만들기’ 17호점인 것. 이 프로젝트는 제주의 음식문화 경쟁력을 강화하고 곤경에 처한 영세식당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프로그램이다. 2014년 이래 22호점까지 나왔다. 이날 박 셰프의 등장은 정기 점검 차원이었다. 맛있는 제주만들기는 이곳 함덕쉼팡처럼 제주여행의 맛집으로 통한다. 왜 그럴까.


“돌문어를 써요. 돌문어는 바로 옆 세화(구좌읍)의 것이 유명합니다. 바로 가져오기 때문에 싱싱하죠. 생면은 제주신라호텔이 열어준 거래처에서 가져 옵니다. 육수의 깊은 맛, 감칠나는 맛은 특급호텔의 비법이죠. 문어탕면 하나를 만들기 위해 호텔 셰프들과 한달 동안 머리를 맞댔습니다. 입맛 까다로운 사람들 앞에서 시식회와 품평회도 거쳤습니다. 한마디로 자연의 맛입니다.”

김씨는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준비한 것처럼 문어탕면 내력을 줄줄이 읊었다. 낯선 이에게 곁은 잠시라도 내주지 않는, 제주사람 특유의 무뚝뚝한 반응에 오히려 신뢰가 갔다. 분위기가 풀어지니 호구 조사까지 성사됐다. 연애결혼을 했고 1남1녀를 뒀다. 남편은 어릴 적에 크게 다쳐 지체장애 1급이다. 맏이인 딸은 교수의 꿈을 위해 서울에 나가 있다. 앞서 호주에서 유학까지 했단다. 아들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한다. 김씨는 2017년 함덕쉼팡을 재개장했다. 그 전에는 인근에서 치킨집을 운영했다. 몸이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홀로 닭을 튀기고 배달을 하고 맥주를 날랐다. 여느 제주 여자처럼 억척같이 살았다. 하지만 아이들 학비를 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난 7일 맛있는 제주만들기 17호점인 함덕쉼팡에서 만난 김은정 영업주(왼쪽)와 박영준 제주신라호텔 셰프. /사진=박정웅 기자
지난 7일 맛있는 제주만들기 17호점인 함덕쉼팡에서 만난 김은정 영업주(왼쪽)와 박영준 제주신라호텔 셰프. /사진=박정웅 기자
◆신라호텔과의 ‘좋은 인연’

“인연이란 게 있잖아요. 우연인 것처럼 보이는 ‘필연’ 말입니다. 장애인 봉사활동에서 남편을 만났고 힘들어졌을 때 신라호텔의 손을 잡았어요. 따지고 보면 인연은 준비된 것처럼 보여요. 열심히 살지 않았더라면 남편과 애들, 신라호텔과의 인연은 없었겠죠.”

김씨는 요즘이 ‘살맛’이 더 난다고 한다. 받은 도움을 되돌리는 노력에 앞장이다. 맛있는 제주만들기 영업주들의 봉사활동 모임인 ‘좋은 인연’의 얼굴 격이다. 박 셰프가 거들었다. “음식 봉사활동을 하면 누나는 메뉴를 더해서 가져옵니다. 한곳에서 하나씩만 해와도 되는 데도요. 더 푸짐하게 나눠야 한다면서요. 손도 무지 큽니다. 주변을 챙기는 성격은 호텔에서 메뉴 개발을 할 때 알았어요. 설거지할 식기가 많이 나오는데 고단할 텐데도 뒷정리까지 다 하는 겁니다. 어려서부터 돕는 일을 해왔으니 마음이 따듯할 수밖에요.”

김씨는 깜짝 놀랄 인연이라면서 식당 벽면의 사진을 가리켰다.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와의 조우다. 이 대표는 지난해 12월 김씨를 비롯한 맛있는 제주만들기 영업주들을 만나기 위해 제주를 찾았다고 한다. 2016년에도 영업주들이 서울신라호텔로 초대돼 이 대표와 식사를 함께 하는 등 서울 나들이 행사를 가졌다.

“처음엔 초청 연락에 설마 했어요. 직접 쓴 손편지를 받았는데 그땐 정말 뭉클했어요. 영업점마다 서로 다른 편지였죠. 감동이었습니다. 좋은 인연이니 대화하며 나누자면서 최신 스마트폰까지 줬어요. 노래방에서 어깨동무를 하며 흥도 맞췄고요. 더 잘할 수 있고 나눔도 더 많이 해야겠다는 다짐이 커졌어요. 약속이니까요.”

이 대표가 맛있는 제주만들기를 자신의 사업장처럼 꼼꼼히 챙긴다는 얘기다. 더구나 속사정이 제각각인 영업주들을 가족처럼 대한다는 소식이다. 최근 22호점이 재개장했으니 이 대표에겐 제주서만 22명의 가족이 있는 셈이다.

“처음 신라호텔을 만났을 때가 떠올라요. 당장에 매출을 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건 꿈을 심어준다는 거예요.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에서 신라호텔도 보람을 느낀다는 겁니다. 꿈과 보람, 지난 1년6개월의 결실입니다. 좋은 인연이요? 함께 살아가는 힘이죠.”

☞ 본 기사는 <머니S> 제584호(2018년 3월19~2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