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신라의 대척점, 계족산성을 밟다
금강 끝자락, 유유히 흐르는 명멸의 역사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대청호와 산들.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대청호와 산들.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걸으며 만나는 모든 것들에 언제나 감사하다. 선인들의 체취와 흔적을 느끼며 때론 대화하고 때론 사색하며 걷는 길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서 있는 산성을 둘러보기 위해 대전 계족산에 올랐다. 이 산은 산줄기의 모양이 닭발 모양으로 펼쳐져 있어 계족산(鷄足山)이라 불린다.


계족산성 서문 성밖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계족산성 서문 성밖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계족산성(鷄足山城)은 신라와 최전선을 마주한 백제의 산성이다. 백제의 수도 웅진과 사비가 이곳에서 아주 가까이에 위치해서 아주 중요한 요지인 셈이다.

경기 북부 연천의 고구려 옛 성들을 찾아 나서던 때의 기억이 이곳 계족산성에서 쫄깃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역사를 재구성하고 추론해보는 것은 언제나 묘한 긴장감을 갖게 한다. 백제와 신라의 치열했던 1500년 전의 시간이 시공을 초월해 가슴 뜨겁게 다가온다.

계족산 황톳길. 길 왼쪽에 황토가 깔려있다.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계족산 황톳길. 길 왼쪽에 황토가 깔려있다.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1500년 전 시간을 걷는 황톳길

계족산 장동삼림욕장 입구에 도착했다. 늦가을 겨울로 접어드는 날씨는 맵차다. 장동삼림욕장을 지나자 시작되는 황톳길은 계족산 허리를 한바퀴 도는 임도 14.5㎞에 폭 1m로 조성됐다.


황톳길은 정비가 한창이다. 긴 장대 톱으로 임도 위 부러질 위험이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정리하거나 황토를 다시 채우는 이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날이 풀리면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무 탈 없이 걷고 즐길 수 있게 해준 사람들의 수고가 마음으로 느껴진다.

길에 흩날리는 낙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길에 흩날리는 낙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한적한 길은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로 채워졌다. 때맞춰 지저귀는 새소리에 길은 활력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곳을 맨발로 걷는 것은 날 풀리는 봄에 밟기로 하고 유서 깊은 계족산성으로 향한다. 차가운 기온에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

낙엽송 사이로 보이는 하늘색은 호수와 닮았다. 황톳길에서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이마에 땀이 맺히고 숨이 가쁘게 차올라 껴입은 겉옷을 벗었다.


서문에서 바라본 계족산성 성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서문에서 바라본 계족산성 성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계족산성의 북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 정상을 둘러싸고 우뚝 자리한 산성이 하늘의 파란색과 대비돼 유난히 눈이 부시다. 새로 복원된 성이라 석축이 깨끗하고 하얗게 보인 탓이다.

성곽의 북벽을 마주하고 좌측 동문 터로 가는 길은 보수중이어서 출입이 금지됐다. 오른편 성곽을 따라 서문 터로 향했다. 이어져 있는 성곽이 장엄하다. 산의 꼭대기를 두르고 있기에 위용은 압도적이다. 아마도 성을 높이 바라보기에 그런 것이리라. 서문 터를 지나니 성곽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다. 성이 꽤 높아 밑을 보니 아찔하다. 높이가 7미터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높이다.

◆백제의 대장성, 계족산성


남문 방향에서 바라본 계족산성.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남문 방향에서 바라본 계족산성.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산성에 올라보니 서쪽은 높고 동쪽이 낮은 형태다. 성의 가장 높은 위치인 서문 쪽으로 올라 둘러본다. 어디를 봐도 막힘이 없이 트여서 시야가 사방으로 수십리를 달린다. 발아래 금강을 품은 대청호와 첩첩이 잇닿은 연봉이 옅은 운무에 실루엣으로 보이는 신비로운 광경을 연출한다. 참으로 장관이다. 저 첩첩한 산과 강에 나룻배 한척과 고기 잡는 늙은이가 있다면 그대로 한폭의 산수화다.

계족산성에는 동문과 서문, 남문이 있고 6개의 건물터가 있다. 또 2개의 우물터가 있으며 남문 터 북쪽 봉우리에 봉수대와 집수지의 터가 있다. 붕괴되고 유실된 산성의 복원사업이 끝나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허물어진 옛 계족산성의 모습.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허물어진 옛 계족산성의 모습.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서문을 돌아 동북 방향의 곡성을 둘러보고 성안의 산 능선을 따라 남문으로 향했다. 남문 봉수대 맞은편은 금강을 담은 대청호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조망권이 가장 좋다. 한참을 머무르면서 옛 백제와 신라의 대치를 떠올려본다.

계족산성은 신라와 마주했던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한눈에 조망하고 지휘할 수 있어 주변 성들의 대장성 역할을 했을 것이다. 견두산성, 이현동산성, 장동산성 등 뭇 성(城)과 보(堡) 20여곳이 일정한 진(陣)을 이루며 계족산성을 중심으로 호위하듯 둘러서 있다.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대장성의 지휘 아래 군성진(群城陣)을 펼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모든 성들이 옛 모습을 찾는다면 참으로 장관일 듯하다.

백제 멸망 후 나라의 부흥을 열망했던 부흥군의 산성으로, 그리고 계명 세상을 추구했던 갑오 동학농민군의 산성으로 존재했던 역사의 옛 자취를 따라 한걸음 한걸음 산성을 밟는다. 1500년 전의 시간을 답성(踏城)으로 느껴본다.

◆역사 실어 유유히 흐르는 금강

장동산림욕장의 장동천.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장동산림욕장의 장동천.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계족산성 남문을 나와 능선을 따라 성재산으로 향한다. 능선은 부드러운 낙엽이 가득해서 발걸음이 편하다. 이따금 마주치는 등산객들의 표정에서 휴일의 여유를 느낀다.

황톳길이 지나는 임도 삼거리로 내려왔다. 성재산에서 내려온 산길은 임도를 만나 우측 반대 방향으로 길을 이었다. 아침 얼어있던 황토가 한낮을 지나자 녹아서 부드러워진다. 추운 날씨에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 사람을 만났다. 발가락 사이로 황토가 삐죽이 배어 나왔다. 내 발가락이라도 된 양 간질거린다.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계족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황톳길에는 색색으로 물든 가을의 흔적이 가득하다. 바싹 마른 낙엽은 실바람에도 어지럽게 흩날린다. 사각거리며 발걸음에 채인 낙엽은 이리저리 도망을 치다 뒹굴며 흩어진다. 그렇게 산산한 낙엽은 가슴에 쌓인다.

금강은 전북 장수의 뜬붕샘에서 시작한다. 충청도 양산을 지나 대청호를 채우고 공주와 부여를 감싸다가 서해로 빠진다. 오랜 시간을 흐르는 동안 명멸했던 역사를 지켜보았을 터다. 치열했던 백제와 신라의 1500년 전의 시간, 고려와 조선의 시간, 갑오년 동학의 시간을 품고 그렇게 흘렀으리라.

☞ 본 기사는 <머니S> 제623호(2019년 12월17~23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