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민주항쟁 30주년 전야제 '2017이 1987에게'가 열린 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 담긴 조형물 뒤로 많은 시민이 전야제에 참석했다. /사진=뉴시스
1987년 6월9일,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던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의 죽음은 6월 민주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사단법인 광주전남6월항쟁(이사장 김상집)은 10일 오전11시 광주 남구 서현교회 건너편 6월항쟁 표석비 잔디마당(광주향교 앞)에서 ‘모두를 지키는 약속,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6월항쟁 33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


광주전남6월항쟁은 "올해 33주년 기념행사는 코로나19라는 국란을 맞아 6월항쟁 당시에 보여주었던 단결된 모습으로 극복하고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 모든 계층의 삶 속에서 확산되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날 기념식은 광주전남6월항쟁 1987합창단의 합창, 박흥산 상임이사의 경과보고, 김상집 이사장의 인사 등으로 열린다. 이용섭 광주광역시장, 송상락 전남도행정부지사, 장휘국 광주광역시교육감과 6월항쟁에 참여했던 광주전남 국회의원들도 참석한다.

5.16 쿠데타로 시작된 27년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6.10민주화운동은 한 학생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더라”는 어이없는 일화를 남긴 물고문 사건의 희생자 박종철이다.

서울대 언어학과에 다니던 박종철은 1987년 1월13일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연행됐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운동권 선배의 소재파악을 조사받던 중 모진 물고문으로 다음날 사망했다. 사건이 축소·은폐될뻔 했으나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이를 폭로하면서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6월10일로 잡았다. 

이한열 열사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기 위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가해 교정 밖으로 행진하다가 전경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았다.

이후 27일간 사경을 넘다들던 이 열사는 그해 7월5일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열사의 부상과 죽음은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면서 6.10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6월10일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대규모 시위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리며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거세졌다. 특히 주요 대학이 15일 기점으로 본격적인시위를 시작했고 18일에는 최루탄 추방 대회가 전국 각 도시에서 열렸다. 더욱이 당시 시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30대 직장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6월29일 국민 저항 운동이 대규모로 확산되자 군사 정권은 시국수습을 위한 조치를 강구한다. 이에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는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한다.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가 제도적으로 정착하며 민주주의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6월 민주항쟁은 시민운동 인식과 실천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평화적인 시위로 정권을 쫓아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매우 높이 평가받고 외신들로부터 호평이 쏟아졌다. 더욱이 국민이 요구하던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 허용 등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시대가 됐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과거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