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반란군에 맞서다 산화…사과 없이 떠난 전두환, 추하다"
故정선엽 병장 형 "12.12사태때 국방부 벙커 지키다…예우해 줬으면"
"동생 잃고 미얀마 선교…'영적 자녀들' 독재 맞서 싸워, 군부와 악연"
뉴스1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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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사실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죠. 그런데 용서가 성립하려면 잘못을 한 사람이 사죄를 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12.12부터 5.18까지 희생당한 국민들, 가족들에게 죄송하다는 말도 못 하고 죽었잖아요. 그걸 보면 참 죽음이 '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 관악구 한 교회에서 만난 선교사 정훈채씨(70)는 자신이 한때 '매일 같이 죽이고 싶었던 인물'이었던 전두환씨의 죽음에 대해 '추하다'는 다소 담담한 평가를 남겼다. 훈채씨는 지난 1979년 12월13일 새벽 전씨를 필두로 한 쿠데타군에 맞서 국방부 초소를 끝까지 지키다 순직한 초병 고(故) 정선엽 병장(당시 23세)의 친형이다.
정 병장은 12.12사태 당일 국방부 지하 B-2 벙커를 지키던 초병이었다. 그는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지키던 진압군 측의 병사들 대부분이 쿠데타 측의 공수부대원들에게 제압됐을 때도 홀로 사격을 하며 저항하다 끝내 사망했다. 제대 3개월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정 병장의 저항은 명백하게 기록으로 남아 그날 1공수여단의 상황일지에는 "벙커 출입구 헌병 근무자 2명 중 1명 체포, 1명은 반항 사격과 함께 벙커로 도주 사살됨"이라고 적혔다.
뉴스1은 쿠데타의 '수괴'들이 세상을 등진 뒤 처음으로 맞는 정 병장의 기일에 앞서 지난 9일 형 훈채씨를 만났다.
◇어떤 설명도 없었던 죽음…어머니는 전두환만 보면 치를 떨어
동생이 사망한 날 아침, 그 사실을 알 리 없던 훈채씨는 출근하며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는 마침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있던 삼각지 앞을 지났고 기사는 "전날 여기서 난리가 났었다"고 말했다. 그곳이 동생이 근무하던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훈채씨는 걱정을 떨쳐낼 수 없어 회사에 도착한 뒤 다시 삼각지로 향했다. 하지만 부대를 찾아가 면회 신청을 해도 돌아온 답은 "안 된다"는 말뿐이었다.
다시 부대에서 연락이 온 것은 그날 오후가 돼서였다. 자신을 '선임하사'라고 밝힌 이는 동생인 정 병장이 수도통합병원에 안치돼 있다는 말 이외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급히 병원으로 향한 훈채씨를 맞이한 것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동생의 모습이었다.
건강하고 씩씩한 동생이 하루아침에 시신이 됐지만 그 죽음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동생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던 부대원은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는지 얼굴에 온통 멍이 든 채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훈채씨는 그저 동생이 어제 일어난 난리의 과정에서 희생됐을 것 같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고령의 부모님이 충격을 받을 것이 우려된 훈채씨는 장례가 끝나고 나서야 동생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동생의 죽음에 상심이 컸던 부모님을 두분만 지방에 둘 수 없어 아예 서울로 모셔왔다.
부모님은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인물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의 죽음 이후 맞이한 세상에서는 TV만 틀면 아들을 죽게 만든 범인의 모습이 나왔다. 훈채씨는 "어머님은 전두환이가 원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원한이 많았다"라며 "TV에 모습이 나오면 '치가 떨린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셨다"고 말했다.
◇동생의 죽음 '전사'로 기록되고 그 군인정신도 기억돼야
정 병장은 군인으로서 명령을 받들어 최후까지 쿠데타군에 맞서 부대를 사수했지만 반란에 맞섰다는 이유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할 뻔했다. 훈채씨는 "당시에 듣자 하니 '반혁명군이기 때문에 국립묘지로도 못 간다'고 했었는데 이튿날인가 '병사들은 관계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훈채씨는 처음부터 부정 됐던 동생의 죽음에 대해 이제라도 그 의미가 정확히 기록되기 위해서 '순직'이라는 표현부터 바뀔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동생에 대해서는 단순이 순직이 아니다"라며 "당시 (국방부를 지키라는) 사수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었고 쿠데타군을 막았기 때문에 그것을 '전사'로 정상적으로 기록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그는 명령을 끝까지 지키려다 산화한 동생의 군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추념 활동이 필요할 것 같다고도 했다. 앞서 12.12 사태 당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쿠데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다 사망한 고(故) 김오랑 중령의 경우 가족들과 군 선후배들의 노력으로 1990년 소령에서 중령으로 추서되었고 2012년에는 보국훈장도 수여받았다.
하지만 정 병장의 경우 순직으로 인한 군인 연금과 현충원 안장 외에는 별다른 예우가 없었다. 33헌병대 소속으로 쿠데타 군에 동원됐다 희생된 박윤관 일병의 경우 사후 상병으로 한 계급 특진 됐지만 정 병장에게는 그런 조치도 없었다.
다만 지난 2017년 정 병장의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교인 광주 동신고등학교에 그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 식수를 심었다. 또 김오랑 중령의 추모사업을 이끌었던 '참군인 김오랑기념사업회' 측에서 정 병장의 죽음에 대해 전후 사정을 밝혀달라고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서를 접수해 조사가 이뤄지고 있기도 하다.
훈채씨는 동생이 장교가 아니라 병사였기 때문에 별다른 추모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며 아쉬운 마음을 표했다. 이어 그는 동생의 죽음을 기리는 작업이 있어야 추후에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병사들이 보고 따를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더불어 훈채씨는 명예회복 작업에 더해 결국 잘못을 한 사람들의 사과가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전두환씨는 끝까지 사죄를 안 하고 삶을 마감했는데 피해자들의 원한이 더 커진 것은 아니지만 본인의 마지막 모습이 좀 추했다"라며 "제 생각 같아서는 그 아들분들이 국민들에게 아버지의 잘못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동생 죽음 이후 얻은 '영적 자녀'들도 불의와 맞서
한편, 동생의 죽음은 훈채씨의 삶을 크게 바꿔 놓았다. 어려운 집안 사정에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을 해 돈을 벌었던 훈채씨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5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인 훈채씨는 바로 손아래 동생인 선엽씨에게는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형에게 선엽씨는 사망 일주일 전 전화를 걸어 "재대를 하고 학교를 마치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어릴적부터 늘 강직하고 올곧았던 동생에게 거는 기대가 컸던 훈채씨는 유학 비용을 다 대 줄 테니 마음껏 공부를 해보라고 답을 해주었다.
그렇게 아끼던 동생을 잃은 뒤 훈채의 마음은 종교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신앙에 대한 고민이 점점 깊어지던 그는 2000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2003년 목사 안수를 받고 미얀마로 선교활동을 떠났다.
20년 가까운 선교 활동 동안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현지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는 그동안 47명의 아이들을 청년으로 키워냈으며 그들이 곧 '영적인 자녀'가 됐다고 했다.
하지만 '군부 독재'와의 악연은 끝나지 않았는지 미얀마에서 올해 2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훈채씨의 47명의 아이들 중 상당수가 군부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 몇몇은 산속으로 들어가 저항군이 됐고, 잘 나가던 공직자였던 아이들은 '군부의 밑에서 일을 할 수 없다'며 직을 버리고 저항의 길로 뛰어들었다.
훈채씨는 체포돼 고문을 받고 투옥되는 아이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코로나19에 감염돼 어쩔 수 없이 귀국해야 했던 훈채씨에 바람은 어서 빨리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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