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정취가 완연했던 시월의 일요일 오후, 서울 도심 속 아트홀에서는 평생을 건반에 바쳐온 김진호 피아니스트의 무대가 열렸다. 사진은 서울 강남 역삼동 세일아트홀 무대에 선 김진호 피아니스트와 소프라노 조경주.
가을의 정취가 완연했던 시월의 일요일 오후, 서울 도심 속 아트홀에서는 평생을 건반에 바쳐온 김진호 피아니스트의 무대가 열렸다. 사진은 서울 강남 역삼동 세일아트홀 무대에 선 김진호 피아니스트와 소프라노 조경주.


가을의 정취가 완연했던 시월(10월 26일)의 일요일 오후, 서울 도심 속 아트홀에서는 숨 막히는 정적과 기대감이 감돌았다. 무대 위 조명 아래, 평생을 건반에 바쳐온 노장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베토벤의 깊은 울림이 터져 나오자 객석을 메운 청중들은 시간이 멈춘 듯 그 선율에 빠져들었다.


이날 무대의 주인공은 피아니스트 김진호. 일찍이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국내 음악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으나 세월의 흐름 속에 무대와 다소 거리를 두었던 거장이다. 그런 그를 다시 무대 위로 소환한 것은 그의 음악을 향한 순수한 애정과 헌신으로 뭉친 특별한 이들의 힘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피아노를 처음 배운 김진호 피아니스트는 14세에 국립극장에서 국립교향악단과 베토벤 협주곡 3번을 협연하며 일찍이 '피아노 신동'으로 불렸다. 이후 미국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다니엘 폴락 교수에게 사사하고 뉴욕에서 옥사나 얍론스카야 등에게 정통 러시아 피아니즘을 전수받으며 예술적 깊이를 더했다.


귀국 후 그는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KBS교향악단 등과의 협연을 통해 국내 음악계에 탁월한 해석력과 섬세한 감성을 선보이며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삶은 평생 피아노를 벗 삼아 조용히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지켜온 '오로지 음악으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세월의 흐름 속에 무대와 다소 멀어질 때도 건반을 향한 그의 열정은 결코 식지 않았다.

김진호 피아니스트를 다시 세상의 무대로 불러낸 것은 그의 음악을 애정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이었다. 2023년 봄에 개최된 'Discovering a Forgotten Passion'(잊혀진 열정을 다시 발견하다) 후원회는 어떤 상업적 목적이나 이해관계도 없이 '음악이 가진 순수한 힘'을 믿는 이들이 만들어낸 작은 기적이다.


이들은 봄과 가을마다 소규모 살롱 음악회를 열며 예술가의 '잊혀진 열정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을 함께하고 있다. 김은영 후원회 운영위원장은 "이 무대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시간"이라며 "김진호 선생님의 피아노에 대한 열정과, 후원회 회원들이 '우리의 힘으로 무대를 만들어간다'는 새로운 목표가 만나 음악은 다시 살아가는 이유를 선물한다"고 했다.

올해 가을 열린 여섯 번째 음악회는 '시간을 품은 명곡들'로 구성됐다. 바흐의 경건한 선율로 막을 연 무대는 베토벤의 소나타 8번 비창으로 깊은 감동을 선사했으며 슈베르트, 드뷔시, 엘가, 쇼팽 등 시대를 아우르는 명곡들이 이어졌다. 특히 쇼팽의 환상 즉흥곡은 노장 피아니스트의 완숙함과 여유가 담겨 객석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이번 공연에는 김진호 피아니스트의 오랜 음악적 벗인 소프라노 조경주가 특별 출연해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 등을 협연했다. 두 사람의 오랜 인연이 빚어낸 평온하고 조화로운 울림은 가을 오후의 정취를 한층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 특별한 음악회의 진정한 의미는 무대 위의 연주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용히 마음을 보태는 후원자들부터 객석을 메우는 청중, 그리고 예술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동료 음악가들까지 이들은 모두 '음악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나눔과 헌신이 모여 비로소 한편의 아름다운 선율이 완성된다.

더 나아가 김진호 피아니스트의 복귀는 평생을 음악에 헌신했으나 은퇴 후 설 자리를 잃어가는 시니어 음악인들에게 '다시 연주할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를 던져준다. 후원회 관계자는 "따뜻한 후원과 관심이 널리 퍼져 은퇴 이후에도 노장 예술가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더 많이 생겨나길 기대한다"며 "노장의 연주가 선사하는 여유와 관용이 우리 일상에 깊이와 풍요를 더하듯, 이들의 음악을 가까이에서 만날 기회가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의 문화적 감수성 또한 성숙해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