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2금융권 은행에 주택담보대출 상품 안내문이 붙어있다./사진=뉴시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의 호황으로 올해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12% 넘게 증가하면서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도 빠르게 하락할 전망이다. 그러나 성장을 이끈 소득이 일부 반도체 기업과 고소득·고자산층에 집중된 반면 일반 차주의 소득 여건은 크게 개선되지 않아, 거시지표 개선을 가계의 실질적인 채무상환 능력 향상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경제의 외형은 커졌지만 빚을 갚아야 할 차주의 지갑은 여전히 팍팍한 '분모의 착시'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Illusion:GDP 3000조원 시대에도…"가계빚 줄어든 거 아냐"]

20일 금융권에 따르면 재정경제부는 최근 발표한 '하반기 경제성장전략'에서 올해 명목 GDP 성장률을 12.3%로 전망했다. 전망대로라면 1996년 이후 3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지난해 명목 GDP 2676조6748억원에 정부 전망치를 적용하면 올해 명목 GDP는 처음으로 30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


명목 GDP가 큰 폭으로 늘면 가계부채가 줄지 않더라도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자연스럽게 하락한다. 금융당국이 관리지표로 삼는 가계부채 비율의 분모가 빠르게 커지기 때문이다.

다만 금융당국은 명목 GDP 확대에 따른 비율 하락만으로 가계부채 관리 기조를 완화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올해 가계대출 증가율을 지난해 1.7%보다 낮은 1.5% 이내로 관리한다는 목표에도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 80% 후반으로, 선진국 평균인 60% 중반을 크게 웃돌고 있다.


신진창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은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만을 보고 가계부채를 관리해 나갈 일은 아니다"며 "명목 GDP 성장률이 높은 것이고 명목 GDP 규모가 커진 것이지, 가계부채 규모가 작아진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Concentration:반도체가 밀어 올린 소득…"일부 산업·계층에 집중"]

올해 명목 GDP 급증은 경제 전반의 고른 소득 증가보다 반도체 수출가격 상승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한국은행 조사국의 이종웅 차장·김다애 과장·한진수 조사역이 작성한 이슈노트 '이번 교역조건 개선은 왜 다른가: 반도체 경기 호조의 실물경제 파급영향'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실질 GDP는 전년 동기 대비 3.8% 증가했지만 실질 국내총소득(GDI)은 13.2% 뛰었다. 두 지표의 성장률 격차는 9.4%포인트로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60년 이후 가장 컸다. 명목 GDP 성장률도 17.1%에 달했다.

이번 교역조건 개선은 국제유가 하락으로 수입물가가 낮아졌던 과거와 달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물가 상승이 이끌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2009년과 2015∼2016년, 2020년에는 국제유가 하락이 교역조건 개선의 주된 원인이었다. 올해 1분기에는 수입물가가 전년 동기 대비 5.4% 올랐는데도 수출물가가 14.9% 상승하면서 교역조건이 개선됐다.


반도체는 수출 물량뿐 아니라 가격도 크게 오르면서 같은 양을 수출하고도 국내로 유입되는 소득이 급증하는 데 기여했다. 올해 1분기 반도체 가격은 전년 동기 대비 92.5% 급등했다. 반도체를 포함한 정보기술(IT) 부문이 전체 수출물가 상승분의 73.4%를 차지했다. 순상품교역조건지수도 국제유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22.8% 개선됐다. 교역조건 개선으로 발생한 실질무역이익은 GDI의 6.3%로 사상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AI 확산에 따른 반도체 수요가 단순한 경기순환을 넘어 구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도 과거와 다르다. 빅테크 기업 간 시장 선점 경쟁과 AI 인프라 투자, 피지컬·에이전틱 AI 등 활용 영역 확대가 이어지는 가운데 공급 증가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반도체 가격 강세가 상당 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국제유가까지 안정되면 수출물가 상승과 수입물가 하락이 동시에 교역조건에 우호적으로 작용해 GDI가 GDP를 크게 웃도는 흐름이 이어질 수 있다.


문제는 반도체가 벌어들인 소득의 수혜층과 가계부채를 떠안은 차주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임금 상승은 반도체 등 IT 부문과 대기업·고소득층에 집중돼 있다. 올해 4월 기준 IT 제조업 종사자는 전체 종사자의 2.6%에 불과하다. 주가 상승에 따른 자본이득도 주식 보유 규모가 큰 고자산층에 상당 부분 귀속됐다.

지난해 가계가 주식과 펀드 등을 통해 거둔 자본이득은 400조원을 웃돌아 가계 총처분가능소득 1508조원의 약 4분의 1에 달했다. 다만 자산 증가가 실제 소비로 이어지는 정도는 계층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주식자산이 1원 늘었을 때 소비 증가 효과는 자산 하위 1∼2분위에서 0.14원이었지만 상위 4∼5분위에서는 0.01원에 그쳤다.

자산이 적은 가계는 늘어난 자산을 생활비나 소비에 활용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지만, 고자산층은 추가 자산의 상당 부분을 다시 저축하거나 투자한다. 이에 주가 상승의 이익이 고자산층에 집중될수록 전체 소비를 끌어올리는 효과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명목 GDP와 국민소득이 크게 늘더라도 일반 가계의 소비 여력과 체감경기가 같은 폭으로 개선되기 어려운 이유다.

반도체 산업의 고용·생산 파급효과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도 소득 확산을 제약한다. 전체 제조업 생산에서 IT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거 30% 미만에서 올해 1분기 51%로 높아졌다. 전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8% 안팎에서 18.8%로 상승했다. 그러나 IT 제조업은 다른 산업보다 생산·취업 유발효과가 낮고 변동성은 높아, 반도체 생산 확대가 경제 전체의 고용과 가계소득 증가로 같은 폭만큼 이어지기는 어렵다.

반도체 기업의 투자 확대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효과에도 한계가 있다. 주요 예측기관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자본지출이 지난해 75조원에서 올해 120조원, 내년 150조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국내 반도체 산업은 제조장비 투자의 6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대응한 해외 직접투자도 늘고 있다. 기업소득과 투자가 증가해도 그 효과가 국내 고용과 가계소득으로 온전히 돌아오지는 않는 구조다.
경기 평택항에 수출입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모습./사진=뉴시스


[Debt:"부채비율보다 차주의 소득과 원리금 상환능력 봐야"]

반면 차주의 이자 부담은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연 2.50%에서 2.75%로 인상한 데다 추가 인상 가능성까지 열어두면서 변동금리 대출을 중심으로 원리금 상환 부담이 확대될 전망이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16일 통화정책방향 결정문에서 "향후 통화정책은 금리 인상 기조를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며 "추가 인상의 시기와 속도는 물가상승 압력의 정도와 경기 개선 흐름, 금융안정 상황 등을 점검하면서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반도체 기업의 이익과 성과급, 주식 자본이득은 일부 산업과 계층에 집중되는 반면 금리 상승에 따른 부담은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을 보유한 차주 전반에 돌아가는 구조다. 국가 전체의 명목소득이 늘더라도 일반 차주의 소득이 함께 증가하지 않는다면 개별 차주의 채무상환 능력은 개선되기 어렵다.

이종욱 국민의힘 의원이 한은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주담대 금리가 0.25%포인트 상승할 경우 주택 관련 대출 차주가 부담하는 연간 이자는 총 1조8000억원 늘어나는 것으로 추산됐다. 차주 1인당 연평균 이자 부담도 584만3000원에서 613만9000원으로 29만6000원 증가한다.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소득이 부동산 등 비생산적 부문으로 유입돼 금융불균형을 키울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보고서는 반도체 호조에 따른 성과가 생산적 투자보다 부동산 등 비생산적 부문으로 흘러갈 경우 금융불균형이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생산요소와 자원이 IT 부문에 과도하게 집중되면 다른 핵심 산업의 생태계가 약화하고 계층 간 불균형이 심화할 가능성에도 유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번 반도체 경기 호조와 이에 따른 교역조건의 큰 폭 개선은 향후 내수 증가세를 지지하는 핵심 동인이 될 것"이라면서도 "그 혜택이 일부 산업·계층에 편중돼 있는 만큼 거시경제적 성과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중장기 성장경로가 달라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