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4시에는 사무실에서 나가야 하거든요. 그 전에 오시면 만날 수 있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경쾌한 목소리는 상대방마저 밝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작은 이태리 화장품 수입업체 OM에 근무하는 안성미(35) 씨. 안씨는 강남구의 작은 사무실로 기자를 안내했다. 사무실이 너무 단촐하다며 밝게 웃는 그는 새 사무실에 둥지를 튼지 막 사흘째다.

'경단녀'.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결혼 이후 출산과 육아로 직장을 그만 둔 여성들은 사회에 다시 발을 내딛기가 쉽지 않다. 외국계 화장품회사에서 9년간 홍보 업무를 맡았던 안씨도 마찬가지였다.
 
◆돌쟁이 아이, 결핵 걸리자 퇴직 결심

안성미 씨가 육아를 위해 회사를 그만둔 것은 전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물론 업계에서도 인정받았던 그는 회사일과 육아를 충분히 병행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문제는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터져 나왔다.

"일하면서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힘들어 조선족 아주머니를 고용했어요. 2년 동안 아이를 아주머니에게 맡겼는데 아이가 그만 결핵에 걸린 거예요. 알고 보니 아주머니가 결핵 보균자였던 거죠."


(사진=류승희 기자)
안씨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갓 돌이 지난 아이가 1년간 약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행여나 잘못되면 폐결핵으로 번지거나 뇌성마비가 올 수도 있었다. 안씨는 아이에게만 전념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때마침 잡힌 프랑스 출장도 그의 결정을 거들었다. 아이의 생일날 출장이 잡혔던 것. 파리에서 지낸 며칠 동안 그는 자괴감에 빠졌다. 5시만 되면 퇴근하는 프랑스인들이 가족끼리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며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일하고 있나', '돈은 왜 벌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안씨는 업무상 야근이 많아 한가롭게 아이를 돌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당시를 떠올리던 안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프랑스 출장은 인생의 목표가 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 출장이었어요. 한국에서 일할 때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만 했으니 아이를 직접 키우는 것은 꿈도 못 꿨죠." 

그렇게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둔 안씨는 육아에만 전념했다. 자연히 생각도 바뀌었다. 아이는 반드시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마음을 달리 먹게 됐다. 안씨는 집에서 아이와 항상 붙어지냈다. 아이에게 전념하며 시간에 쫓길 일 없이 한가로운 삶을 즐기기를 2년. 안씨의 삶은 여유가 넘쳤지만 어딘지 채워지지 않음을 느꼈다.

"제가 굉장히 활동적인 성격이거든요. 아이와 둘이서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려니까 나중에는 그게 스트레스였어요. 아이에게 화도 더 많이 내게 되고. 그래서 결국 일을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다시 찾은 일… "나도 아이도 행복"

그에게 일은 천성이었다. 하지만 전처럼 그의 24시간이 일로만 채워질 수는 없었다. 그는 새 직장을 구할 때 주 3일만 일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것도 오후 4시면 퇴근해 아이를 돌본 후 밤 9시부터 다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았다. 오후 5시엔 어린이집에 맡겨놓은 아이를 데리러 가야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더라도 다시는 아이를 떼어놓을 수 없어서다.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도 모자란데 3일만 일하겠다는 그를 어느 회사에서 받아줄까 싶었다. 하지만 기회는 찾아왔다. 새 일을 시작한 곳은 이태리 화장품 브랜드로 한국에 이제 막 진출한 회사였다. 그 회사는 화장품 홍보 업무에 베테랑인 안씨가 필요했다.

"저는 정말 운이 좋았어요. 이태리에 있는 사장 역시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여서 자연스럽게 제 상황을 받아들여줬어요. 너무 감사할 따름이죠."

그의 업무는 퇴근 후 아이를 돌보다 아이를 재운 밤 9시부터 다시 시작된다. 낮 동안의 일과 육아로 몸이 녹초가 돼도 성취감이 더 컸다. 그는 이제 밤만 되면 매일 보던 TV 대신 컴퓨터를 켠다. 한동안 손을 놓았던 컴퓨터 프로그램이 낯설지만 다시 하나하나 깨우쳐 가고 있다.

"보고서 하나 만드는 것에도 뿌듯함을 느껴요. 엄마가 행복하니 아이에게도 더 잘 하게 되고요. 남편도 다시 활기찬 제 모습을 보고 적극 지원해 줍니다."

안씨에게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때와 다른 꿈이 생겼다. "물론 제게 일은 두번째예요. 아이가 항상 우선이죠. 하지만 아이가 편해야 제 일이 잘 되고, 일을 해야 행복한 엄마가 되는 것처럼 이제는 이 둘 다 잘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