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이 블랙컨슈머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식빵에 쥐를 넣거나 제품을 일부러 부순 후 책임을 떠넘기는 식의 제조업체의 블랙컨슈머와는 성격이 다르다. 상담원을 모욕하거나 과도하게 포인트를 요구하는 등 도를 넘은 행각을 보이는 것이 금융권 블랙컨슈머의 모습이다. 특히 신뢰가 중요한 금융회사들은 자사의 이미지 실추를 우려해 블랙컨슈머의 행패에 안절부절 못하기 일쑤다.

상황이 이쯤 되자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은 용단을 내렸다. 정 사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콜센터에 전화 걸어서 직원들에게 성희롱이나 험한 욕을 퍼부으면 2번 경고 안내 후 전화를 차단하는 정책을 입안했다"고 밝혔다. 민원지수가 떨어져도 콜센터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카드가 강도 높은 대책을 내놨지만 다른 금융회사로 확산되기까지 아직은 멀어 보인다. 금융권에서 활개치고 있는 블랙컨슈머의 사례와 대처방안을 알아봤다.
 
 

◇ 외로운 블랙컨슈머

#1. 자신이 우수고객이라고 생각하는 40대 A씨. 그는 일주일에 5일, 하루 평균 3~4차례 콜센터로 전화를 건다. A씨가 늘어놓는 얘기들은 상담과는 무관한 사적인 것뿐이다. 직장에서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생겼다며 상담원에게 화풀이하거나 휴가를 간다며 자랑하는 등 사적인 얘기로 장시간 업무를 방해한다. A씨가 콜센터 직원에게 얘기하는 것은 한결같다. 자신은 우수고객이기 때문에 상담원은 고객이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불응하면 욕설, 폭언은 물론 성희롱 발언을 쏟아 놓는다.

#2. B씨는 C카드사에서 변태고객으로 통한다. 여성상담원과 통화를 고집하는 B씨는 지속적으로 성희롱적 발언을 늘어놓는다. 남자직원이 전화를 받으면 다시 여성상담원을 바꿔달라고 떼를 쓴다. 직원이 끝내 전화를 바꿔주지 않을 경우에는 남자가 콜센터에 근무한다며 모욕감을 주기도 한다.

금융회사는 이 같은 블랙컨슈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엔 '당장 찾아와서 사과하라'거나 '센터장이나 팀장이 몇시까지 와서 사과하라'며 도를 넘은 요구까지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는 정신이상자도 많다는 게 콜센터 담당자들의 전언이다. 한 은행의 콜센터 관계자는 "술 마시고 전화하거나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내는 경우도 많다"며 "콜센터 직원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토로했다. 한 카드사 직원은 "낮에 통화를 시작했는데 밤까지 전화를 붙잡고 있는 직원도 있다"고 밝혔다.
 
◇고객은 왕이니까 "다해줘"

#1. 배우자의 기프트카드로 상품을 구입하려고 했던 D씨. 본인이 아니어서 승인이 거절되자 D씨는 기프트카드를 구입하기 위해 지점을 방문해야 했다. 구입이 거절된 것 때문에 화가 난 D씨는 자신이 먼 거리를 이동했다며 자택 인근에 지점 개설을 요구했다.

#2. E카드사 콜센터 직원은 F씨의 요구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F씨는 카드 승인이 발생할 때마다 결제 예정 금액과 포인트 적립 예정 금액을 확인해 자신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F씨는 생일이나 연말연시에 버젓이 선물을 요구하기도 한다.

왕대접을 받으려는 고객의 목적은 따로 있다. 금전적인 보상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별것 아닌 실수에도 큰 보상을 원한다. 한 카드사에서는 "카드를 신규로 발급받은 회원의 카드가 배송 예정일보다 하루라도 늦어지면 과도한 포인트를 요구하는 고객도 있다"고 말했다.

고객의 실수를 직원의 실수라며 보상을 요구하기도 한다. 카드에 적힌 사용자의 이름을 외국식으로 이름-성 순으로 할 것인지, 우리식으로 성-이름으로 할 것인지는 고객이 정하는 것임에도 이름과 성이 바뀌었다고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

말꼬투리 하나하나를 잡아가며 "불친절했으니 포인트를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한 카드사 고객센터 관계자는 "응대 매뉴얼대로 하기 때문에 불친절하게 응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그렇지만 만에 하나 직원이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고객의 요구를 들어 준다"고 말했다.
 

◇ 속수무책 금융사, 전담팀이 별도 관리

이렇게 까다로운 고객을 하나하나 응대하다보면 시간이 지체돼 정작 상담을 필요로 하는 고객의 응대가 늦어지기 일쑤다. 이에 각 금융기관에서는 블랙컨슈머 전담반을 따로 두기도 한다.

이들은 민원이 잦은 소비자에게 상담전화가 걸려오면 케어 프로그램에 따른 응대를 한다. 한 은행 관계자는 "블랙컨슈머는 패턴방식이 있다"며 "그에 적절히 응대할 수 있는 숙련된 전담자가 따로 대응한다"고 설명했다.

한 카드사의 블랙컨슈머 전담팀장은 "초기 응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초기 응대를 잘못했을 경우 문제가 확대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팀장은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처 역시 소극적인 방법에 불과하다. 금융회사는 이미지 실추를 우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고객센터 담당자는 "아무리 블랙컨슈머라도 고객을 보호하는 쪽으로 유도해야 한다"며 "차라리 탈퇴시키면 좋겠는데 이미지가 나빠지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만에 하나 생길지 모르는 회사 측의 실수 때문에 응대에 더욱 조심스러운 면도 있다. 블랙컨슈머 담당자는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면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금융회사의 잘못도 어느 정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고객의 민원은 대부분 수용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도가 적은 회원들은 여러 카드를 사용하면서 다른 카드회사와 서비스를 비교해보고 '왜 이 카드는 서비스가 없느냐'고 항의하기도 한다"며 "이럴 때는 고객의 제안으로 여겨 받아들이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한 카드사 고객센터 팀장의 말은 상담의 고충을 짐작하게 한다. "블랙컨슈머란 말 자체를 쓸 수 없습니다. 전화가 걸려온다면 어쨌든 고객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