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학이 '어찌어찌학'이 된 이유
이 의문은 중국어를 공부하고 베이징 특파원으로 부임한 이후에야 비로소 풀렸다. Geometry의 앞부분인 Geo의 발음이 '지오'인데 이를 중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음이 비슷한 幾何(지허)로 표기한 것을, 일본에서 한자를 그대로 쓰면서 발음만 '기카'(幾何, きか)로 한 것을 한국에서도 그냥 기하(幾何)로 사용한 것이다. 중국인에게 '지허'는 '지오메트리'의 음역(音譯)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지만, 지오메트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하'를 배우는 한국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도형학'이라고 하면 알기 쉽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회계학에서 많이 나오는 대차대조표도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이는 영어의 'Balance Sheet'(B/S)를 일본에서 '貸借對照表'(다이샤쿠다이쇼효, たいしゃくたいしょうひょう)로 번역한 것을, 한국에서 한자를 우리식대로 읽은 것이다. 자산을 기록하는 면을 차변(借邊)이라 하고, 부채를 기록하는 면을 대변(貸邊)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에는 이런 개념이 없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B/S를 '자산부채표'(資産負債表)라고 부른다. 얼마나 쉬운가. 자산은 왼쪽에, 부채는 오른쪽에 기록해 비교하는 표가 바로 B/S라는 것이, 자산부채표라는 말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다. 대차대조표가 뭐하는 물건인지 아리송한 것과 천지차이다. 기업의 영업성과를 나타내는 'Profit and Loss Statement'(P/L)를 '손익계산서'라고 쉽게 부르면서, 자산부채표는 왜 그렇게 어려운 대차대조표를 고집하는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경제학을 처음 배울 때 나오는 '무차별곡선'도 '잘못된 용어' 때문에 경제학을 공부하려는 많은 젊은이들이 의욕을 잃는다. 이는 영어의 'Indifference Curve'를 일본에서 '無差別曲線'(무샤베츠교쿠센, むしゃべつきょくせん)이라고 직역한 것을 한국에서 그냥 우리식대로 한문을 읽어서 생긴 비극이다. Indifference Curve는 2개의 상품, 예를 들어 사과와 배를 고를 때 어떻게 선택하더라도 똑같은 효용을 주는 점들을 이은 선을 가리킨다. 이 곡선 위에서는 효용이 같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Indifference)는 뜻이다. 따라서 등효용곡선(等效用曲線)이라고 하면 귀에 쏙 들어온다. 이는 기업의 생산비용을 배울 때 나오는 '등비용곡선'(Iso-cost Curve)에서도 확인된다.
선물(先物)도 마찬가지다. 영어의 'Futures'를 가리키는 선물은 잘못된 번역의 대표적 예다. Futures는 갑(甲)과 을(乙)이 미래의 특정 시점, 예컨대 3개월이나 1년 뒤에, 금이나 석유, 또는 주식을 사고팔기로 현재 계약 맺는 것을 가리킨다. 일본에서는 Futures를 '사키모노'(先物, さきもの)라고 번역했다. 일본에서는 16세기부터 '사키모노' 거래가 이뤄졌고, 일본에서는 '사키'(先)가 미래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Futures를 사키모노(先物)로 번역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전혀 다르다. 한국에서 선(先)은 현재보다 앞선, 즉 과거의 의미만 있을 뿐 현재보다 뒤에 오는 미래의 개념이 없다. 선조(先祖) 선대(先代) 선사시대(先史時代) 등 모두 과거를 나타내는 말에만 쓰인다. 따라서 미래에 이뤄지는 거래를 선물이라고 하면 우리 뇌에서는 혼동을 일으킨다. 일본에서 先物이라고 했다고 해서 우리가 선물이라고 하면 膳物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다. 오히려 Futures는 래물(來物)이나 후물(後物)로 하든지, 아니면 순한글인 뒷물로 하는 게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외래어 번역에 원칙 있는 中·日…우리나라는?
선물과 기하학, 대차대조표와 무차별곡선…. 개국과 근대화에서 앞선 중국과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언어표현에 맞춰 번역한 말, 그러니까 한글과 전혀 관련이 없는 국적 없는 말을 아직도 버젓하게 쓰고 있는 것은 왜일까. 일본에서 메이지(明治)유신을 일으켜 근대화에 앞장선 지도자들은 메이지유신(1868년) 직후 '국립번역원'을 설립했다. 서양에서 들어오는 책을 일본어로 번역해 자국민이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서양의 개념을 일본어로 바꿀 때 관련 분야 전문가와 일본어 학자들이 함께 모여 치열한 토론을 거쳐 일본화된 용어를 만들었다.
중국도 신중국(공산화된 중국)이 건립된 1949년 이후 외래어를 중국어로 번역할 때 일정한 기준을 정하고 있다. 뜻과 소리를 이용해 의역(意譯)과 음역(音譯)을 해 신화통신(新華通信)이 정리하면 통용된다. 칵테일을 지웨이지오(鷄尾酒, Cock Tail을 의역한 것)라고 하거나 아이슬란드를 빙다오(氷島, Iceland를 의역한 것)로 하는 것처럼 어색한 말도 적지 않지만, 커커우커러(코카콜라, 可口可樂, 음역과 의역을 함께 한 케이스)나 번츠(벤츠, 奔馳, 힘차게 달린다는 뜻)처럼 무릎을 치게 하는 훌륭한 번역도 많다.
세계적 축구대회인 월드컵(World Cup)을 스졔뻬이(世界杯)라고 부르는 것도 일리가 있다. 예선전을 위쉬앤싸이(豫選賽, 싸이는 시합이라는 뜻이다)라고 하고 A~H조로 나눠 벌이는 경기를 샤오주싸이(小組賽)로 부르며, 리그전을 쉰환싸이(循環賽), 토너먼트를 타오타이싸이(淘汰賽)로 번역하는 것도 그럴 듯하다. 홈구장은 주창(主場)이 되고 어웨이구장은 커창(客場)이 되는 것도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한때 한국에서도 코너킥을 모서리 차기로, 프리킥을 자유축(自由蹴)으로, 드로링을 던지기 등으로 부르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냥 영어든 독일어든 소리 나는 대로 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한자로 번역해 놓으면 아무런 생각 없이 한자를 한글로 읽는다. 이렇다보니 용어의 상당부분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이 한번 듣고 이해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 표기만 한글로 한, 암호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선물, 기하학, 대차대조표, 무차별곡선에서 느낀 어려움과 분노는 날이 갈수록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만큼 세계에서 가장 컴퓨터에 잘 맞는 한글은 갈수록 이상하고 어려운 말이 되고 있다. 우리 아들 딸과 손녀 손자들이 뜻과 소리가 따로 노는 한글 속에서 갈수록 헤맬 것을 생각하니 30년 전, 기하학을 배우면서 느꼈던 당혹스러움이 더욱 강해진다.
<저작권자 © ‘존중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 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