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독교인들에게 이번 대선은 참으로 선택이 어려웠다. 민주당과 공화당 대선후보 가운데 누구도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성경이 금하는 동성애 결혼을 찬성한다고 공개 선언했고 밋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는 기독교에서 이단이라고 규정한 몰몬교 신자인 데다 기독교 우파와 가까운 공화당의 폴 D. 라이언 부통령 후보마저 천주교 신자인 탓이다.
사진_뉴스1 한재호 기자
◆기독교계가 선택한 롬니 후보 탈락
이러한 갈등 상황 속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결국 롬니 후보를 선택했다. 기독교 율법에 어긋나는 동성애 결혼보다는 교리가 다를지언정 기독교 율법을 고수하는 몰몬교 신자를 선택한 셈이다.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그간 고수해왔던 정치적 중립성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공개적으로 롬니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미국 천주교도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이 생명과 종교적 자유,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위협한다고 맹비난했다.
미국 보수주의 정치운동가 랠프 리드가 2009년에 설립한 비영리단체인 '믿음과 자유연합'(Faith and Freedom Coalition)은 무려 11만7000개 교회를 통해 3000만부의 투표 지침을 배포하고 2400만건의 우편물과 2600만통의 전화를 통해 수천만명의 유권자들과 접촉했다. 물론 롬니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이었다.
하지만 기독교계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의 승리는 오바마 대통령에게로 돌아갔다.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란 점이다. 기독교계를 더욱 충격에 빠뜨린 사건은 대선과 함께 주별로 치러진 주민투표에서 기독교가 추구하는 원리원칙들이 모두 거부당했다는 사실이다.
메인주, 메릴랜드주, 워싱턴주에서는 주민투표 결과 동성 결혼이 합법화됐고 미네소타주에서는 동성 결혼 금지를 주법에 명시하는 방안이 주민투표에서 부결됐다. 워싱턴주와 콜로라도주에서는 주민투표를 통해 의료 목적이 아니더라도 마리화나 사용이 가능해졌다. 낙태 반대를 공개적으로 주장한 상원의원 후보들은 줄줄이 낙선했다.
미국 남침례신학대학교의 R. 앨버트 몰러 주니어 총장은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수백만명의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대선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선거 결과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또 "우리는 낙태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동성애 결혼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데 (선거에 진 것은) 이러한 우리의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 메시지는 전해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가 선거에 진 것은) 전체적인 도덕적·윤리적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라며 "점점 더 세속화되고 있는 미국은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지만 우리의 입장을 거부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번 대선과 몇몇 주에서 치러진 주민투표 결과는 미국 종교계의 커다란 변화를 나타나는 한가지 징후일 뿐이다. 미국은 기독교적 신념에 따라 건국된 기독교 국가지만 여론조사회사인 퓨 리서치가 지난달 '종교와 공적생활' 포럼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인의 5분의 1은 종교가 없다.
젊을수록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져 18~22세 청년층에서는 3분의 1이 자신을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 혹은 종교적으로 아무것도 선호하는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일수록 선거 때 자유주의적 사상을 가진 후보와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경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에디슨 리서치의 출구조사에 따르면 종교가 없다고 대답한 사람들의 70%가 이번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투표했다.
◆"백인 기독교계, 선거전략 부족" 지적도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비영리단체인 '공공 종교 리서치협회'(Public Religion Research Institute)의 로버트 P. 존스 대표는 "이번 선거는 백인 기독교계 전략의 효력에 최후를 알렸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은 백인 기독교인 10명 가운데 4명 미만의 지지를 얻는데 그쳤지만 나머지를 흑인과 히스패닉사회의 압도적인 지지와 더불어 종교적으로 무관심한 사람들의 지지로 채웠다"고 말했다.
기독교 지도자들도 자신들의 입지가 축소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은 숫자가 줄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늙어가고 있다. 기독교 우파의 조직 기반이 되어온 초보수적 남침례회연맹을 비롯한 대형 교회들은 교인수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퍼먼대학교의 정치학 교수인 제임스 L. 구스는 "장기적으로 이는 공화당 지지층이 종교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위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기독교와 천주교 내에 자유주의적인 활동들도 늘고 있다. 진보적인 목사들은 이번 대선 때 동성 결혼을 공개 지지했다. 또 천주교 공식 입장은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반대였지만 '버스를 타고 달리는 수녀들'(Nuns on the Bus)이라는 단체는 중서부지역에서 라이언 공화당 부통령 후보의 예산 제안이 실현되면 사회보장제도가 축소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번 선거에서 기독교 유권자들의 비율이 생각만큼 중요했던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번 대선 때 유권자 가운데 백인 기독교인들의 비율은 26%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던 2004년보다 오히려 3%포인트가 더 높았다.
기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것은 공화당의 롬니 후보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몰몬교도였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이단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없다고 판단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탈했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복음주의자들은 압도적으로 롬니 후보를 지지했다. 에디슨 리서치의 출구조사에 따르면 복음주의자들은 78%가 롬니 후보를 찍은 반면 오바마 대통령에게 투표했다는 대답은 21%에 그쳤다.
보수주의 정치 운동가인 리드는 "우리가 신앙을 가진 유권자들보다 더 앞서 나갈 수는 없다"며 "젊은층, 미혼, 여성 특히 독신 여성, 소수인종 등에 대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서 비율이 급격히 늘고 있는 히스패닉은 대다수가 천주교인이거나 기독교인이다. 그럼에도 오바마 대통령은 롬니 후보보다 히스패닉 유권자 사이에서 44%포인트나 득표율이 높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민법을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한 덕분이다. 이는 공화당과 기독교, 천주교의 선거전략 부족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미국 천주교계도 이번 선거 결과에 충격을 받기는 기독교계와 마찬가지다. 천주교 주교들은 이번 대선 때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펼쳤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지를 선언한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홍보활동에 힘을 쏟았고 오바마 대통령이 종교적 자유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강화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4년 전보다 소폭 낮아지긴 했지만 이번 대선에서 천주교도는 50대 48의 비율로 오바마 대통령을 더 지지했다. 미국 새크라멘토 교구의 제이미 소토 주교는 "천주교인들이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다만 그들도 성당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해 고민은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5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존중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 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