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많기도 하다. 한국 경주마의 역사가 시작된 종마목장, 왕실 가족사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서삼릉, 막걸리 100년 전통의 술 박물관…. 한글자 여행이지만 구구절절 쏟아지는 사연 속으로 떠나본다.
◆말 - 말들의 사관학교, 원당 종마목장
다채로운 볼거리는 없다. 광활한 초지에서 말 한두 마리 보았으면 그걸로 만족해야 하는 곳이다. 게다가 출입을 제한해 들어가 거닐 수도 없다. 이 공간은 모두 말과 기수를 위한 곳이다.
그런데 이런 끝이 안 보이는 초지가 이곳의 핵심이다. 이렇게 바라만 봐야 하는, 정복을 허용하지 않는 벌판을 본 적이 있는가. 약 36만㎡ 중 16만5000㎡이 초원이고 83칸의 마방이 있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그저 바라보는 게 다다. 일상에서 보고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았던 눈·귀·뇌·몸에 휴식을 주는 시간이다.
이곳은 경주마 사관학교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장애물 경기를 하기 위해 만들어 졌는데 1997년에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한국마사회가 운영 중이고, 국내 최초의 경주마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 있는 말들은 과천 경마공원에서 뛰는 말들인데 이곳에서 기수들도, 말들도 훈련하게 된다.
여행자로서 종마목장을 즐기는 법은 무얼까. 일단,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좋다. 계획된 놀이동산이 아니어서 주차장이 넉넉하지 못하다. 입구에 도착하면 은사시나무가 줄을 선 산책길을 거닐고, 탁 트인 마방지를 보며 멀리 있는 말 몇마리를 숨은그림찾기 하듯 감상한다. 상황이 맞으면 작은 망아지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데, 늘 가능한 건 아니다. 걷다 보면 경주로를 따라 벤치가 있는데 이곳에 앉아서 멋진 곡선을 그리는 하얀 펜스와 초록을 즐기자. 운이 좋으면 달려가는 말과 기수를 코 앞에서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들이 일으키는 먼지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아이와 함께라면 ‘말문화체험’을 예약하는 것도 좋다. 아이는 말을 타 볼 수 있고 어른에게도 아이의 보호자라는 핑계로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시설을 둘러볼 수 있는 특전이 있다.
◆능 - 곡절 많은 서삼릉
<미술관 옆 동물원>이 아니라 ‘목장 옆 능’이다. 종마 목장 옆에는 ‘서쪽에 있는 세개의 능’, 서삼릉이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능이 많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고 하니 한번쯤 볼만하지 않을까. 사실 이곳은 3개의 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명종과 숙종 이후 조선말기까지의 후궁, 대군, 군, 공주, 옹주 등의 분묘가 군을 이루고 있다. 즉 조선 후기 왕실묘지다. 게다가 번번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중종, 철종, 사도세자, 정조, 폐비 윤씨 등의 이야기가 이 묘역과 관계가 있다.
서삼릉의 ‘삼(三)’은 희릉, 효릉, 예릉 이렇게 세개의 능을 말한다. ‘능’이라는 말은 왕과 왕비·계비에 붙일 수 있으니 희릉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 효릉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쌍릉이고, 예릉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이다.
이 중 희릉은 원래 정릉이었다. 중종과 장경왕후가 나란히 영면했으나 중종의 두번째 계비인 문정왕후가 중종의 능을 지금의 강남 선정릉으로 이장하였다. 아들을 낳고 7일만에 사망한 것도 억울한데, 다음 계비의 질투로 죽은 후에도 왕과 생이별을 한 것이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합장되기를 바랐지만, 그녀도 결국 지금의 태릉에 잠들었다.
예릉의 주인인 철종은 강화도령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 난 은언군의 손자인데, 강화도에서 잊혀진 왕족으로 가난하게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왕이 됐다. 이 사실만으로도 한편의 드라마가 그려진다. 그는 왕이 되며 사랑하는 여인과 이별했고, 태어나는 아이들마다 단명했다. 별다른 업적 없이 유명을 달리했고 고종이 자리를 이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철종의 능인 예릉이 조선왕조의 무덤 양식을 따른 마지막 묘라고 할 수 있다.
의령원과 효창원은 왕이 되지 못한 세자의 묘다. 의령원은 사도세자(장조)의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의 것이고, 효창원은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의 것이다. 이들은 3살과 5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 두묘는 나란히 있으면서 능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아 가까이서 봉분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장희빈 만큼이나 소설·드라마·영화의 단골손님인 페비 윤씨의 묘를 비롯해 왕실 가족들의 묘가 있지만 이들은 효릉과 함께 일반인 공개가 제한돼 있다. 효릉에 잠들어 있는 인종은, 생모가 희릉의 주인인 장경왕후이다. 인종은 아이러니 하게도 어미와 아비의 무덤을 갈라놓은 문정왕후 아래서 성장했고, 병약했던 그는 재위 9개월 만에 사망했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설이 있다.
◆술 - 100년 전통 배다리 술 박물관
곡절 많은 왕족사에 목도 맘도 칼칼하다. 마침 100년 전통의 양조장, 배다리 술 박물관이 근처에 있다. 창업주 박승언 옹이 1915년 창업한 이래 양조면허 계승을 5대째 이어오고 있다니 맛이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맛도 보기 전에 ‘배다리’라는 이름부터 궁금하다. 전시장에 있는 안내문을 보니, 과거 한강에서 홍수가 나면 이곳까지 물이 차서 여러 척의 배를 묶어 다리를 만들어 길을 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배다리란다. 말도 예쁘고 아기자기한 조상님들의 지혜가 느껴진다.
2층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전통의 양조장답게 하나씩 수집한 것이거나 기증받은 물품들이다. 이 중에서도 백미는 높이 2m의 정종사입통이다. 일제강점기 정종 공장에서 실제로 썼던 것이라는데 제1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위엄 있게 관람객을 맞이한다. 제2전시장은 배다리 양조장이 되기 전인 1대 ‘인근상회’ 때의 유물과 소도구, 1970년대 삼송리에 있었던 실비옥 풍경을 재현한 것이 재미있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전통주와 술병, 전통주 빚는 과정, 각종 술 만드는 도구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층 막걸리바에서 비로소 막걸리 한사발을 맛본다. 특유의 청량감과 감칠맛은 자연발효 때문이라고 한다. 목 넘김 또한 부드럽다. 5대가 이어온 비법은 탁주의 단점인 입 트림이 없는 점이고, 뒤끝이 깨끗하다고 하니 다음 날 아침을 기대해 볼 만하다. 청와대에 납품하던 막걸리이며 북한에까지 전해져 김정일도 좋아했다고 하는 게 헛말은 아니겠다 싶다.
말, 능, 술…. 할 말이 많아서 가족 여행에도 좋고 데이트 코스로도 좋겠다. 여행하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동행자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 여행으로 확실히 느낄 수 있겠다. 서울에서 지하철로도 갈 수 있는 곳, 이번 주말엔 누구와라도 함께 떠나보자.
[여행 정보]
● 원당 종마목장 가는법(서삼릉과 접해 있음)
[승용차]
1. 고양 IC(외곽순환도로) - 원당역 방면 직진(2km) - 농협대학·서삼릉·경마교육원 이정표 삼거리에서 좌회전
2. 화정지구 - 원당역 끼고 우회전 (1km 직진) - 농협대학·서삼릉·경마교육원 이정표 삼거리에서 좌회전
[대중교통]
지하철 삼송역 하차 - 5번 출구 앞 041번 마을버스 승차 - 서삼릉·경마교육원(종마목장) 하차
[주요 스팟 내비게이션 정보]
원당 종마목장 : 검색어 ‘원당 종마목장’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201-79
서삼릉 : 검색어 ‘서삼릉’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
배다리 술 박물관 : 검색어 ‘배다리박물관’ / 경기도 고양시 성사1동 470-1
<여행지 주요정보>
원당 종마목장
(02)509-1682~4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5시 (수~일요일 개방)
관람요금 : 무료
말문화 체험 : 4~11월 / 매주 토·일요일 오전 11시~오후 4시 / 1만원 / 키 130cm 이하 어린이 / 기승체험, 시설견학(동반가족 포함), 기념품
서삼릉
(031)962-6009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30분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요금 : 성인 1000원 / 소인 500원
효릉(일반인 미개방 지역) 관람 : 월 2회 토요일 오전 10시
해설사 운영 : 오전 10시 30분, 오후 2시(단체관람 시 전화예약)
배다리 술 박물관
http://www.baedari.co.kr / 031-967-8052
관람시간 : 오전 10시 ~ 오후 7시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요금 : 무료
막걸리바 : 막걸리 1500원 / 4개 포장세트 6000원 / 프리미엄 막걸리 5000원
< 숙소 >
서삼릉 야영장 : 1968년 조성된 전통의 야영장. 가족 캠프장과 오토캠핑장이 있으나 단체 스카우트 행사가 많을 때는 예약이 불가능하니 사이트에서 미리 확인, 예약하고 가는 게 좋다.
http://scoutcenter.scout.or.kr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200-5 / 031-967-9163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8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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