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종이의 경제적 가치가 하락하고 기업과 관공서 등에서 ‘페이퍼리스’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종이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우리는 이미 각종 청구서를 메일로 받고 계약을 태블릿PC로 진행하는 등 페이퍼리스시대를 살고 있다. 페이퍼리스는 앞으로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머니S>가 페이퍼리스의 경제적 가치와 앞으로의 전망, 전자문서 정착에 따른 문제점과 해결해야 될 과제를 짚어봤다.<편집자주>
# 김지수씨(29)는 인터넷은행 계좌가 3개 있지만 종이통장은 하나도 없다. 스마트폰으로 모든 금융거래가 이뤄지는 디지털금융을 이용해서다. 김씨는 “부모님 세대에는 ‘통장관리를 잘해야 돈을 모은다’고 강조했지만 지금은 입출금을 알려주는 인터넷뱅킹 알림메시지 하나면 통장관리를 똑똑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로 14㎝, 세로 8.7㎝’ 20여쪽의 종이통장이 사라지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계좌를 개설하고 간편하게 이체하는 디지털금융이 확산된 결과다.
금융권에 따르면 신규 종이통장 발급계좌는 2012년 81.2%에서 2016년 66.8%로 줄었다. 반면 종이통장을 발급하지 않은 온라인전용 계좌는 같은 기간 18.8%에서 33.2%로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2020년 9월 종이통장 사라진다
금융당국도 종이통장 줄이기에 나섰다. 금융감독원은 은행의 태동기부터 120년 넘게 이어진 종이통장 발행을 단계적으로 감축하고 있다. 2020년 9월까지 3단계에 걸쳐 ‘통장기반 금융거래 관행 혁신방안’을 추진한다.
올해 9월부터는 은행창구에서 통장 발급·미발급을 선택해 사용하고 2020년 9월부터는 종이통장 미발급을 의무화한다.
제작비가 필요한 종이통장이 점차 사라지는 셈이다. 은행이 종이통장 1개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금액은 5000~1만8000원이다. 종이통장 제작원가 300원을 포함해 인건비와 관리비가 포함된 금액이다.
고객이 종이통장을 만들지 않으면 이 비용을 줄일 수 있어 금리우대 같은 혜택이 돌아간다. 물론 디지털금융이 익숙하지 않은 60세 이상 고객은 무료로 종이통장을 발급받을 수 있다. 통장을 원하지 않은 경우에만 예금증서를 발행해주거나 이메일을 통해 거래명세서를 전송하는 방식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융거래 내역은 전산시스템과 물리적으로 분산된 백업시스템에서 안전하게 관리되기 때문에 종이통장이 없어도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다”며 “통장 무용론이 힘을 얻어 조만간 은행에서 종이통장을 보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종이통장 없애기, ‘페이퍼리스’ 움직임은 전세계적은 디지털금융 흐름이다. 미국 은행은 1990년대, 영국은 2000년대 들어 종이통장을 발행하지 않고 저축은행(미국)이나 주택대부조합(영국)만 예외적으로 종이통장을 만들어 준다.
중국과 일본 은행도 2010년대 들어 고객이 요청할 때만 종이통장을 발행한다. 통장발급에 따른 비용을 줄이고 불법거래된 종이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사용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최근에는 통장을 비롯해 대출신청 시 작성해야 했던 많은 서류도 비대면으로 대체 가능해졌다. 인터넷은행인 카카오뱅크는 ‘3무’(무서류·무담보·무방문)대출인 비상금대출을 선보여 3분 안에 편리하게 대출을 제공한다.
저축은행도 행정자치부에서 운영하는 ‘행정정보 공동이용 서비스’를 통해 고객 동의 시 주민등록 등·초본이나 국민기초생활수급자증명서 등 이용자의 자격과 소득확인 자료를 준비하지 않아도 대출을 허용한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금융권에 예금은 물론 대출거래 서류를 간소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며 “고객이 금융회사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줄어 금융거래 편의성이 커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카드 신청·보험계약도 전자서명
페이퍼리스는 카드와 보험권에도 자리 잡았다. 신용카드 모집인이나 보험설계사를 만나 일일이 종이서류에 작성하지 않아도 카드신청과 보험상품 계약이 가능해졌다.
모바일이나 컴퓨터로 카드회사 홈페이지에서 카드를 신청하면 발급심사를 거쳐 3일 안에 발급된다. 신용카드 발급을 위한 소득확인 서류도 행정자치부가 운영하는 행정정보공동이용시스템을 통해 고객이 직접 발급받을 수 있다.
보험계약은 내년 10월부터 모바일기기로 전자서명하는 방식이 허용된다. 기존에는 보험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동일한 경우에만 전자서명으로 보험상품을 계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사망을 보험사고로 하는 보험상품계약도 타인의 동의를 전자서명으로 대체할 수 있다. 단 전자서명의 위변조를 방지하기 위해 지문정보를 함께 입력해야 한다.
지문정보는 이미지 자체로 보관하지 않고 특정정보만 추출·암호화하는 블록체인기술로 저장된다. 보험회사와 제3의 기관이 특정정보를 나눠 보관해 지문정보가 유출돼도 부정사용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너무 빠르다" 막연한 불안감 떨치려면
페이퍼리스 확산에 금융소비자들은 다소 엇갈린 반응을 보인다. 통장과 서류를 없애는 대신 금리우대 혜택을 준다는 장점에 호응하는 한편 디지털금융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령자 등 금융소외자가 역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고 우려한다.
무엇보다 금융권의 페이퍼리스 도입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는 지적이다. 특히 종이통장은 수첩이나 일기장보다 더 필수적인 종이수단으로 꼽혀 장기적인 감축대책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종이통장이 등장한 떄는 최초의 상업은행인 ‘한성은행’이 설립된 1897년. 120년 만에 나온 통장 축소방침이 선진국에 비해 턱 없이 느리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으나 '공짜 통장'을 유료화하는 과정이 3년이라는 점에서 숨 가빠 보인다.
실제 은행창구에선 지난달 시작된 종이통장 선택제 도입에 고객과 직원 간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은행은 신규고객에게 종이통장 발급 의사를 묻고 ‘Yes’ 한마디면 종이통장을 발급한다. 반면 고객은 종이통장 축소에 따른 막연한 불안감, 통장발급 비용 지불에 대한 불만이 증폭된 상태다.
금융전문가들은 종이통장 감축에 대한 우려나 공포가 과장된 측면은 없는지 살펴보고 금융당국과 금융회사가 종이통장 감축대책 홍보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백종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2020년이 돼도 사라지는 것은 종이통장이 아닌 ‘공짜통장’”이라며 “은행은 비용절감효과에 주목해 무통장거래를 유도하기보다 디지털금융 교육, 종이통장 감축계획을 홍보하고 종이통장을 서서히 줄여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10호(2017년 10월18~24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