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內侍)의 사전의식이다. 가난한 아버지는 아이를 시술소에 데려갔다. 내시를 만들어 분명 아이라도 피죽 신세를 면하게 하려는 뜻에서다. 가난한 이들이 들락거린 시술소는 이름처럼 제값을 했을까. 초라한 움막에서 아버지의 뜻을 대신 펴지 못하고 그의 손을 놓은 아이도 숱했을 터다.
시술소가 아니면 아버지는 자식의 그것을 자연 괴사토록 명주실로 묶었다고 한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게 효의 시작이라 했다. 하지만 터럭 한끝마저 오롯이 보존하는 것에서 비롯한다는 공자의 효는 역설적으로 훼손된 몸으로 완성됐다. 그것도 이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름으로써 말이다. <효경>은 가난 앞에선 화석이었다.
내시는 어엿한 관원(官員)이다. 문헌에 따르면 8세 전후에 궁궐에 들어가 10여년을 수학한 뒤 정식 내시가 된다. 조선조 내시는 300명 정도였는데 이 중 60명이 종9품(상원) 이상의 관직을 받았다. 공식적인 최고 관직은 종2품 상선(尙膳)이다. 임금의 수라를 책임지는 내시부의 수장으로 오늘날 차관급에 해당한다.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문고리 권력'을 쥐기도 한 그들은 은퇴 후 궁궐에서 멀지 않은 북한산 자락 등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 씨 없는 수국 마른 꽃송이는 잔설에 덮이고
서울 은평구 진관동(옛 진관내동)에는 국내 최대규모의 내시묘역이 존재했다. "국내 최대의 내시묘역이 위치한 이 구간에는 군신의 예를 목숨처럼 여기며 왕을 그림자처럼 보좌한 내시의 역할과 삶을 재발견할 수 있다."
지난 12월9일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이처럼 소개한 북한산둘레길 10구간 '내시묘역길'을 찾았다. 호기심과 기대가 컸나. 최대규모는 고사하고 봉분 하나 온데간데없다. 효자동공설묘지(고양시)에서 방패교육대앞까지 '내시묘역길'을 강조하는 이정표만 요란했다. 3.5㎞ 구간엔 수국이 잔설에 잔뜩 고개를 떨궜다. 수국 꽃의 대부분은 생식 능력 없는 중성화(무성화)다.
씨 없는 이들은 도대체 어디 있나. 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성2주차장에서 백화사로 향한다. 길 양쪽을 감싼 울타리가 연신 내시묘역길을 가리킨다. 울타리는 사유지(개인재산)의 경계를 뜻한다. 특히 의상봉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백화사 방향의 울타리는 다른 곳에 비해 더 견고해보였다.
◆ 내시묘역에 대한 여러 갈래 기억들
갈림길과 백화사의 안내지도에는 내시묘역을 붉은색으로 분명하게 표시했다. 혹여 지나쳤을지 몰라 여러 차례 헛걸음을 했다. 지나는 탐방객과 백화사 아래의 여기소마을 주민에게 물었으나 허사였다. 아무도 내시묘역의 위치를 몰랐다. 아니면 알면서도 말 못한 사연이 있으려나. 백화사 뒤로는 의상봉과 용출봉, 용혈봉이 불끈한 바위산의 자태를 뽐냈다.
'군거불의 독립불구'(群居不倚 獨立不懼). 군신의 예를 목숨처럼 여기며 왕을 그림자처럼 보좌한 내시다. 죽어서도 그들은 '함께 있었으나 기대지 않았고 홀로 있었으나 의심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를 지웠다. 그들이 모신 왕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
내시와 궁녀 연구 전문가인 박 회장은 2005년 '북한산 내시묘 답사기'(北漢山 內侍墓 踏査記)를 썼다. 답사기는 진관내동 중골마을 일대에 38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북한산 내시묘역을 확인했다. 박 회장은 중국에도 남아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서울에서 유일한 내시 집단묘역임을 주장했다. 따라서 하루 빨리 국가 사적(史蹟)으로 지정받아 보호받을 날을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2010년에도 내시묘역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은평구가 지역구인 이재오 전 의원(당시 특임장관)은 트위터에 "북한산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불광중학교에서 효자농장까지 갔다. 백화사 뒤 내시묘가 인상적이다"는 현장 소식을 공유했다.
북한산둘레길이 조성된 2010년까지 내시묘역이 존재했다는 방증이 이처럼 여럿이다. 하지만 박 회장를 비롯한 학계의 바람과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묘역 일대의 토지주가 바뀌면서 행방이 묘연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다른 곳에선 흔한 표지석조차 없다. 만시지탄이나 박 회장이 적었던 '문인석(文人石)이 5쌍, 비석이 5기, 상석(床石)이 20기, 망주석(望柱石)이 9기였던 석물(石物)'의 일부라도 찾았으면 좋겠다.
◆ 서울 4대 명찰 진관사와 은평한옥마을
내시묘역길에서의 씁쓸함을 뒤로 하고 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로 향한다. 여기소마을의 여기소(汝其沼)는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관리를 만나러 먼 시골에서 온 기생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 못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을 간직했다. 여기소경로당 옆 표지석이 터의 유래를 알린다.
사유지의 경계는 여기소경로당 갈림길에서도 마주한다. 과거엔 중골계곡을 건너 진관사 방향 9구간으로 이어졌다. 포털사이트의 지도는 지금도 그길을 가리킨다. 그길을 따라가면 낭패다. 대신 둘레길 이정표를 따라가야 한다. 아쉬운들 어쩌겠나. 4차선 북한산로를 따라 진관사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북한산로 왼쪽엔 계곡 따라 보수공사가 한창인 데크길이다. 방패교육장부터가 9구간이다. 좌회전해 삼천교를 건너면 왼쪽이 삼천사를 오르는 등산로이고 오른쪽이 진관사 방향 둘레길이다.
식당가를 지나면 은행나무숲이 반긴다. 가을이면 화려한 '인생샷'의 출사지로 꽤나 붐볐을 곳이다. 은행나무숲 맞은편엔 한그루 보호수가 은평한옥마을을 굽어본다. 실개천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이 은평한옥마을이고 왼쪽이 진관사다. 9구간은 한옥마을 방향이다.
천년고찰 삼각산 진관사(津寬寺)는 서울 근교 4대 명찰의 하나다. 1010년 고려 현종이 왕위계승 과정에서 자신을 구한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했다. 한국전쟁 중 나한전, 칠성각, 독성전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됐다. 1963년 주지로 부임한 비구니 최진관(崔眞觀) 스님의 노력으로 옛 사격을 복원했다.
2013년엔 복원된 진관사 국행수륙대재가 중요무형문화재 126호로 지정됐다. 특히 진관사는 항일운동의 거점 사찰이다. 2009년 칠성각 해체복원 중 독립운동가 백초월(白初月) 스님이 숨겨둔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이 발견됐다. 왼쪽 귀퉁이가 불에 탄 이 태극기(등록문화재 제458호)는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제정한 국기 양식과 동일하다.
2014년 개관한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 삼각산(북한산)이 품은 은평과 한옥 등을 소개한다. 다만 그 외관은 한옥마을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 아쉽다. 더 가면 또 다른 내시묘가 있다는 8구간 '구름정원길'이나 가라앉은 마음과 함께 걸음을 접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20호(2017년 12월27일~2018년 1월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