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국 숨결 오롯이… 가슴 시린 절경들
패자는 말이 없는 법. 흥망성쇠의 역사, 지배당한 국가는 육신과 정신 모두를 빼앗긴다. 망한 국가가 자신의 혼을 온전히 지킬 순 없다. 또 지배국은 이를 철저히 유린하기까지 한다.
새벽 ‘백마강’ 기운은 차다. 낙화암을 휘감은 얼어붙은 ‘비단강’은 여명 속 잔잔한 은빛을 반사한다. 절벽 끝 강상과 만난 고란사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얼음에 갇힌 유람선은 시절 좋았을 여름을 떠올릴 뿐 얼음을 박차고 나아갈 기운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모가지가 떨어진 백제는 강의 이름마저 농락당했다. 당나라 소정방은 백마의 머리를 잘라 비단강(금강)의 용(백제왕)을 낚았다. 비단처럼 곱던 비단강은 어느새 백마강이 됐고 1500년가량을 그렇게 불렸다. 짐짓 유행가 가락 탓인가. 스스럼없이 백마강이라 말하는 지역민도 많다.
부소산 낙화암 팔자는 기구하다. 소위 삼천궁녀로 함축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낙화암은 그의 타락과 무능함을 강조하는, 승자의 곡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뭇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타사암’(墮死巖)에서 떨어지는 궁녀를 꽃으로 해석한 ‘낙화암’(落花巖)으로 고작 이름만 고쳐지었다.
승자의 입장이라지만 멀쩡한 명승을 두고 떨어져 죽은 바위라니, 세상사 참 짓궂다. 또 왜곡된 삼천궁녀 이야기, 후대에 이를 기린다는 고란사와 궁녀사의 창건 유래도 푸르게 살아있으니 새벽 찬 기운에 가슴마저 헛헛하다.
유네스코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향한 지난 3일, 새벽녘 고운 눈발이 흩날렸다. 비단강행 버스의 첫 행선지는 고구려 장수왕에 잔뜩 기가 눌린 22대 문주왕이 수도를 옮긴 충남 공주(웅진)다.
◆무령왕릉과 웅진백제
공산성(公山城)은 본래 웅진성(熊津城)이었다. 곰나루 또는 고마나루, 다시 말해 공주의 옛 지명인 웅진의 이름을 땄다. 당초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석성으로 개축했다. 공산성은 64년간 웅진백제의 궁성으로서 수도인 공주를 지켰다. 높지 않은 해발 110m의 능선에 성을 쌓았다.
절벽에 솟은 성곽길은 아찔하다. 공산성이 북쪽으로 금강을 방패삼은 천연 요새임을 직감할 수 있다. 언덕길에서 내려다본 만하루 연지의 입은 하마처럼 크다. 토성의 흔적은 광복루와 영동루에서 볼 수 있다. 영동루 또는 진남루에서 바라본 공주 구도심은 옹기종기 예쁘다. 피신한 조선 인조의 이야기가 담긴 쌍수정과 추정 왕궁지는 가족나들이에 좋다.
웅진백제하면 당시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한 25대 무령왕을 빼놓을 수 없다. 공산성에서 내려와 연화문과 청동거울로 치장한 문을 지나 30분 정도 걸으면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이다. 연화문과 청동거울은 무령왕릉의 상징이다.
도굴의 손때를 피한 수많은 유물이 온전히 출토됐는데 금제관장식(국보 제154호)을 비롯한 국보급 유물이 무려 12점이나 된다. 국보 제154호에서 제165호(나무발받침)까지가 모두 무령왕릉 출토품이다. 국사 교과서에 등장한 금제관장식은 특히 백제의 화려한 미적 세계를 대변한 걸작이다. 외부의 소리나 미동이 없는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금제관장식의 잔잔한 미동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무령왕릉의 유물 진품은 송산 너머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와 사비백제
따라서 웅진보다 너른 들판, 서해와 더 가까우면서 드넓은 부여의 금강은 사비시대를 연 전륜성왕의 포부를 담기에 족했다. 성왕은 국호도 남부여로 바꾸고 중흥을 꿈궜다. 부소산성과 관북리(추정 궁터), 국찰인 정림사, 궁의 연못인 궁남지가 일직선 축을 이룬 부여는 한반도의 첫 계획도시였다.
성왕의 비운은 역설적으로 백제금동대향로라는 한국 고고미술사의 걸작으로 이어졌다. 동맹을 깬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참극을 맞이한다. 분리된 머리와 몸은 각각 신라와 백제로 돌아갔다. 그의 아들 위덕왕은 슬픔과 충격의 도가니에서 3년간 왕위 승계를 거부했다. 그동안 목 없는 선왕의 원혼을 살핀 것 중 하나가 백제금동대향로다.
본래 국내든 국외든 출토지역인 부여를 떠날 수 없는데 딱 한번 금강을 떠난 적이 있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개장 기념과 관련한 것으로서 당시 무수한 이야기를 낳았다. 그만큼 중요하신 몸이니 친견하려면 122년 남부여의 고도로 와야 한다는 뜻이다.
◆미륵사탑과 사비백제 후기
유홍준이 그토록 찬미한 “압도하는 스케일의 중량감, 적당한 비례의 배흘림기둥, 정연한 체감률로 안정감을 주는 중층구조”엔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이내 “백제인들의 우아한 세련미”까진 나아가지 못했다.
또 부여가 낳은 시인 신동엽이 <금강>에서 말한 “그날은 / 저 탑날개 / 이끼 위 / 꽃잠자리가 / 앉아 있었다”라는 애틋한 연인의 ‘마한, 백제의 꽃밭’ 서정도 돋지 않았다. 꽃 피는 봄, 오랜 시간을 덮은 뚜껑이 열리면 다시 찾아볼 일이다.
미륵산(용화산) 남쪽에 자리한 미륵사지는 동아시아 최대의 사찰터로 꼽힌다. 미륵산에서 마를 캤다는 서동(맛동, 훗날 30대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설화가 얽힌 곳이다. 무왕은 이 금마면과 왕궁면(왕궁리) 일대에 두 도읍 청사진을 그렸다. 기존 수도인 사비에다 이곳을 더해 2곳의 도읍을 둔다는 전략이다.
공식적인 백제사는 없다. 안팎에서 이를 기록한 정사나 야사, 또는 한중일 삼국의 역사를 종합해야 한다. 승전국의 입맛으로 쓴 자료도 되짚어봐야 백제의 퍼즐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다. 따라서 백제의 이야기엔 늘 ‘추정’이라는 단서가 따라붙는다. 유홍준은 그런 백제 역사기행을 상급자 코스로 간주했다. 많지 않은 돌덩어리 또는 잔편에서 피고 진 역사의 흐름을 읽어야 해서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28호(2018년 2월21~27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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