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업들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선진 경영문화 정착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주주이익과 경영투명성 제고를 위한 다양한 제도를 마련하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형식적인 장치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머니S>가 우리나라 경영선진화의 민낯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갈길 먼 ‘경영 선진화’] ①‘빈껍데기’ 사외이사
대주주의 전횡과 독단경영을 막고 기업경영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도입된 사외이사제도가 ‘속 빈 강정’으로 전락했다. 독립적인 위치에서 경영활동을 객관적으로 감시·감독해야 하지만 사실상 지배주주와 경영진의 결정에 힘을 보태는 ‘거수기’ 역할을 하는 데 그치고 있어서다.
우리나라는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총수나 전문경영인(CEO)의 무리한 기업운영을 견제해 정책사항 결정을 위한 조언과 전문지식을 제공하고 기업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제도 도입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사외이사의 제대로 된 기능수행과 독립성 확보는 요원하기만 하다.
◆매년 반복되는 '거수기' 논란
사외이사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 20년간 꾸준히 제기된 문제다. 제도도입 이후 공정거래위원회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사외이사의 미흡한 역할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관련 규제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기업들도 자체적으로 제도를 보완하는 등 사외이사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지만 실효성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다.
공정위가 지난해 말 56개 공시 대상 기업집단 소속 상장회사에서 이사회의 경영감시 작동 현황을 살핀 결과에 따르면 56개 집단 소속 253개 상장회사의 사외이사는 787명으로 전체 이사의 50.1%를 차지했다. 253개 상장회사가 관련법에 따라 선임해야 하는 사외이사는 703명인데 84명을 초과해 선임한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사외이사를 강화해 감시기능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외이사의 이사회 참석률은 95.3%에 달했는데 2017년 5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1년간 이사회안건 5984개의 99.57%가 원안대로 통과됐다.
특히 대규모 내부거래 관련 안건 810개 중 부결된 안건은 단 한건도 없었다. 2건이 수정 또는 조건부 가결됐을 뿐 나머지는 원안 가결됐다. 내부거래 안건의 경우 수의계약 사유조차 적시되지 않은 안건이 81.7%에 달해 충실한 심의가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각 기업의 이사회가 사실상 ‘거수기’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법 기준을 넘어 사외이사를 선임하고 각종 위원회의 설치·운영을 확대하는 것은 내부 감시기능 확보 차원에서 바람직하다”면서도 “이사회 안건 중 원안가결 비율이 99.5%를 넘어서고 수의계약 내부거래 안건의 81.7%가 수의계약 사유조차 포함되지 않는 등 실제 작동이 형식화돼 있을 우려가 있다”고 진단했다.
◆대주주 손안에 든 사추위
사외이사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설치된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역시 허점을 드러낸다. 현행 상법은 사외이사 후보추천 절차의 독립성을 확보할 목적으로 자산총액이 2조원 이상인 대규모 상장회사에 사추위 설치를 의무화하고 사외이사가 총위원의 과반수를 구성하도록 규정했다.
문제는 경영진이 사추위에 참여해 독립성을 해친다는 점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이 공정위가 지정한 31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중 29개 기업집단의 비금융 상장계열사 174개사의 사추위 설치현황을 살핀 결과 55%인 95개사가 사추위를 두고 있다.
그러나 대표이사가 사추위 위원인 회사가 58개사(61%)에 달했고 사외이사가 위원장인 회사는 18개사에 불과해 사추위 상당수가 독립성이 결여된 채 운영되고 있었다. 지배주주가 사추위 위원인 회사도 13개사(14%)였다. 사실상 지배주주가 이사회를 장악한 셈이다.
정유진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선임연구원은 “대표이사가 사외이사 후보추천 절차에 관여하면 어떤 후보자도 경영진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성을 갖출 수 없고 경영진의 사외이사 지배가 용이해진다”며 “지배주주가 사추위를 맡을 경우에도 국내 상장회사의 주주총회 참석률이 낮은 점을 감안할 때 지배주주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고 일반 주주의 이익 보호는 취약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독립성 확보하려면
전문가들은 사외이사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현행 제도를 수정·보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화령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원은 “사외이사를 성실한 감독자로 유도하기 위해 특히 CEO와의 학연 및 지연 등의 정보를 포함해 중요 사안에 대한 사외이사의 역할, 사외이사들의 출결상황, 이사회에서의 질문 횟수, 발언시간 등과 같은 객관적인 지표들이 주주총회에 보고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사외이사의 임기제한을 풀고 CEO의 이사회 의장 겸직을 금지해 안건 선정자로서의 영향력을 차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유진 연구원은 “사추위 내 대표이사 또는 지배주주의 참여를 배제하거나 일반 주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사외이사를 포함시키는 방안 등이 강구돼야 한다”며 “나아가 사추위 운영을 활성화하고 관련 내용을 투자자에게 공개해 사외이사 추천 절차에 대한 주주의 신뢰를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현재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내용의 상법개정안 2건(김종인, 채이배 의원)이 국회에 제출된 상황이다. 두 개정안 모두 회사 및 계열 회사 임직원의 사외이사 선임 냉각기간을 현행 2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고 사외이사 재직기간 제한 규정을 6~9년으로 신설했다. 또한 사외이사 선임방법에 위원회 내 지배주주 및 특수관계인 배제 조항을 신설하고 소액주주 추천 ‘독립 사외이사’ 선임을 의무화했다.
이수정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원은 “두 개정안을 포함해 사외이사제도 개선 관련 국회 논의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며 “단 사외이사의 자격요건와 선임방법을 강화하는 방법과 별개로 사외이사의 전문성 강화를 위한 인력 풀 확대와 교육과정 도입, 사외이사에 대한 정보제공 의무화 등의 방안 도입 역시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84호(2019년 3월19~2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