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9 세계노동절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영환 기자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본격 추진하기로 했지만 결론을 내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관련법과 제도개선을 먼저 마무리한 후 비준을 추진하겠다던 정부가 돌연 비준과 입법을 동시추진하기로 방향을 바꿔 재계의 불만이 커지고 있어서다.
재계는 ILO 핵심협약 비준 강행은 노동계에 치우친 정책이라며 최소한의 경영권을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가운데 야권도 비준안 처리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어 관련법이 국회 문턱을 넘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비준 추진 속도 내는 이유는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달 2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올해 정기국회에서 ILO 3개 협약의 비준 동의안과 관련 법안이 함께 논의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그간 정부는 ILO 핵심협약의 내용이 국내법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관련법 개정 등을 먼저 논의한 뒤 비준을 추진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비준과 입법 동시 추진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앞서 우리나라는 1991년 ILO에 가입했지만 정해진 핵심협약 8개 가운데 결사의 자유 87호와 98호, 강제노동 금지 29호, 105호 등 4개를 아직 비준하지 않았다.


정부는 이 중에서 강제노동 금지 105호를 제외한 결사의 자유 87호와 98호, 강제노동 금지 29호는 관계부처 협의와노사의견 수렴 등을 거쳐 정기국회를 목표로 비준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는 방침이다.

105호가 제외된 이유에 대해 이 장관은 “우리나라 형벌체계와 분단국가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비준 추진에서 일단 제외했다”면서 “국내 전체 형벌체계를 개편해야 하는 문제와 맞물려 지금 상황에서 비준을 추진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105호는 기존의 정치·사회·경제제도에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견해를 갖거나 표현하는 것에 제재를 가하는 것을 금지하는데 우리나라의 국가보안법 등과 상충되는 문제가 발생해 좀더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지난달 22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정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DB

이처럼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에 속도를 내는 이유는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할 당시 EU 측이 제시한 조건 중 하나가 올 4월까지 ILO 핵심협약을 통과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경영계와 노동계의 이견이 팽팽하게 맞서며 협약 비준에 대한 합의안을 이끌어내지 못해 결국 기한을 넘겼고 최근 EU는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FTA 사상 최초로 분쟁해결절차를 개시했다.

이에 정부가 EU와의 통상분쟁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ILO 핵심협약 비준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실제 이 장관은 “ILO 핵심협약 비준 추진을 통해 우리 경제가 당면한 통상 문제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자율과 상생의 노사관계로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재계·야권 반발 어떻게 넘나

문제는 재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정부가 비준을 추진하는 3개 핵심협약은 노동자들의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강제노동을 철폐해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87호 협약은 기본적인 결사의 자유원칙을 규정하고 자발적인 단체 설립과 가입, 설립된 단체의 자유로운 대표자 선출과 활동 등을 보장하고 있어 해고자와 실업자도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 경우 재계는 노사 간 힘의 균형이 노조쪽으로 기울어져 사측의 경영활동이 크게 위축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우리 국가경쟁력에 최대 걸림돌로 평가되고 있는 대립적·갈등적·불균형적 노사관계와 노동법제 속에서 단결권만 확대할 경우 예상되는 부작용과 사용자측의 우려가 매우 높다”며 “정부는 이런 우리나라 특수성에 입각해 우리 노사관계를 협력적·타협적·균형적으로 전환시키는 틀을 정립하는 국가 노동개혁 차원에서 사안을 다뤄야한다”고 지적했다.



야권도 비준에 부정적이다. 자유한국당은 “ILO 협약 비준이 경제와 노동시장에 미칠 악영향은 불 보듯 뻔하다”며 “정부의 비준강행을 기필코 막아내겠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정부의 비준동의 요청을 다뤄야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위원장을 자한당 의원이 맡고 있고 위원회 구성 역시 보수진영이 절반이라 통과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재계는 노동자의 단결권이 확대되면서 부당노동행위 관련 고소·고발 남발, 관행적 파업 증가, 직장점거에 따른 피해 증가 등이 발생할 우려가 높아질 것이라며 경영계의 방어수단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요구 내용은 ▲대체근로 허용 ▲부당노동행위제도 개선 ▲사업장 내 쟁의행위 금지 ▲쟁의행위 찬반투표절차 보완 ▲단체협약 유효기간 확대 등 5가지다.

추광호 한국경제연구원 일자리전략실장은 “정부가 마련하는 노사관계제도 개선방안에는 노사 간 힘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도록 주요 선진국 및 경쟁국처럼 경영계의 방어권을 보장하는 방안들이 다양하게 마련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95호(2019년 6월4~10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