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를 독식하기 위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그동안 껄끄러운 관계를 이어온 WHO 탈퇴를 선언한 것.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는 미국이 백신과 치료제를 독점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사진=로이터.jpg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확보에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미 세계 각국은 제약기업에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투입하며 백신 생산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다. 하지만 한국은 백신 쟁탈전에서 뒤처져 있다. 치료제나 백신에 대한 투자가 주요국에 비해 형편없이 적기 때문이다. 미국에 비하면 한국의 관련 투자는 30분의 1에 그친다. 이 때문에 한국은 대기표를 뽑고 순번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앞에선 ‘공공재’ 내세우고 실제론 ‘독점 경쟁’

앞서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되면 인류의 공공재로 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전세계 팬데믹(대유행)을 불러온 코로나19와 싸워 이기려면 지구촌 모든 이들이 접근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 WHO 사무총장은 6월25일 “코로나19 백신이 1년 내 개발될 것으로 본다”며 “백신이 개발되면 공공재가 돼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는 한국과 EU(유럽연합)도 동의한 사항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6월30일 화상으로 진행된 한·EU 정상회담발표문을 통해 “정상들은 신종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접근성을 보장하는 상호 지원 필요성과 백신·치료제 연구·개발 협력을 논의했다”며 “코로나19 백신이 세계 공공재가 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하지만 현실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코로나19 중증환자 치료제인 ‘렘데시비르’만 하더라도 미국이 오는 8~9월까지 생산량의 90%가량을 독점한 상황이다. 백신은 이보다 더하다. 영국은 백신 개발기업과 1억도즈(1도즈는 성인 1명이 1회 접종할 수 있는 분량) 규모의 백신 선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미국도 3억명 분의 백신을 공급받기로 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4개국은 백신 공급을 위해 동맹까지 결성하고 4억도즈의 백신 공급물량을 미리 확보했다.
./사진(그래픽)=머니S 김민준 기자

미국 WHO 탈퇴, 선점 전쟁 ‘선전포고’

WHO 탈퇴 선언은 치료제와 백신 확보 전쟁에 불을 지필 것으로 전망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앞으로 개발되는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에 대해 철저하게 자국 이익 우선주의로 갈 가능성이 커서다.

미국 온라인매체 쿼츠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올 2월부터 코로나19 관련 연구에 지출한 비용만 6조원에 달한다. 미국 정부는 기업의 국적에 상관없이 선매입을 위해 가능성 있는 후보군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하고 있다.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4조5700억원, 치료제 개발에 1조1420억원을 각각 투입했다. 여기에 진단기기와 연구 기자재에 각각 540억원, 110억원을 투자했고 이외 다수의 관련 연구에 2900억원을 쏟아부었다.

미국이 투자한 백신 개발기업은 ▲노바백스(1조9240억원) ▲아스트라제네카(1조4430억원) ▲모더나(6373억원) ▲존슨앤드존슨(5529억원) ▲MSD·IAVI(480억원) ▲사노피(360억원) 6곳이다. 치료제 개발과 관련해 투자한 기업은 ▲리제네론(8320억원) ▲얀센(1830억원) ▲제넨텍(573억원) ▲아스트라제네카(284억원) ▲CIADM(174억원) ▲그리폴스(151억원) ▲SAb(86억원) 등이다.

이처럼 공격적인 투자는 앞으로 개발될 치료제와 백신을 자국민을 위해 미리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미국은 노바백스와 아스트라제네카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원하면서 각각 1억도스, 3억도스 등의 백신을 미리 선점했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소재 한 유치원에 마련된 선별진료소에서 원아들이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있다. 사진=뉴스1 조태형 기자

물 건너간 ‘공공재’… 자체개발 ‘올인’해야 하는데

정작 한국 상황은 어떨까. WHO 탈퇴를 선언한 미국이 코로나19 치료제나 백신을 개발할 경우 자국 위주의 정책을 펼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따라서 WHO와 공조를 통해 세계 각국에서 개발된 치료제와 백신을 공공재로 도입하려던 한국의 계획은 노선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보건당국은 국산 치료제 개발에 집중할 계획이다. 공공재 도입보다는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상진 복지부 보건산업정책과장은 “세계 최초가 아니더라도 국가 책임 아래 끝까지 개발하도록 돕겠다”며 “유망기업에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을 개발하는 국내 기업에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복지부는 940억원 규모로 치료제·백신 개발에 필요한 임상시험을 전 주기에 걸쳐 지원한다. 항체치료제와 혈장치료제, 백신 등 개발기업에 대한 임상시험 단계(1~3상)에 따라 치료제는 450억원, 백신은 490억원씩 각각 투입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치료제·백신 후보 물질 발굴(10개, 50억원) 및 효능·독성 평가 등 전 임상 단계에서 바이오·의료기술을 개발하는 데 175억원을 지원키로 했다.

이처럼 개발비용을 투입하는 이유는 백신 구매보다 싸기 때문이다. 한국이 공공재를 주장했던 이유는 예산적인 측면이 크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용인병)에 따르면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 조사 결과 한국 국민 5000만명 중 70%가 예방접종을 할 경우 126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이는 지난해 보건복지부 예산(72조5148억원)보다 74%가량 많은 금액이다. 한국이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을 도입하기엔 복지부 전체 예산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셈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이 WHO 탈퇴를 선언한 만큼 치료제와 백신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며 “앞으로 치료제와 백신을 공급받기보다 자력으로 개발해 수급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