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1일 대학로에서 열린 ILO핵심협약비준 촉구 공동행동의 날 행사에서 민주노총 조합원과 ILO긴급공동행동 관계자들이 조속한 비준을 촉구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김병문 기자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재추진에 속도를 내면서 재계의 반대 목소리가 커진다. 국내 법제도 정비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결사의 자유 등 노동계의 단결권을 대폭 강화한 내용의 협약이 비준될 경우 노사 간 힘의 균형이 노동계로 치우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지난 20대 국회에서는 여야의 대치국면으로 자동폐기 됐던 안건이지만 21대 국회에서는 176석을 확보한 거대여당의 주도 아래 통과 가능성이 높다. 재계는 ILO 협약 비준 과정에 사용자의 대항권 논의가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급물살 탄 비준 작업
고용노동부는 7월7일 국무회의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안 3건을 의결했다. 비준안은 대통령 재가를 거쳐 이달 중으로 국회에 제출된다.


ILO 핵심협약은 노동권 보장과 관련한 국제규범 190개 중 가장 핵심적인 조항 8개를 말한다. ▲결사의 자유(87호, 98호) ▲강제노동금지(29호, 105호) ▲아동노동금지(138호, 182호) ▲균등대우(100호, 111호) 관련 협약이 이에 해당한다.

한국은 1991년 ILO에 가입했지만 핵심 협약 8개 가운데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 2개(87호·98호),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 2개(29호·105호) 등 4개를 아직 비준하지 않았다. 국내 노동법과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부분이 있어 이를 먼저 개선한 후 비준을 추진하려 한 것인데 노동계와 경영계의 입장차가 평행선을 달리면서 작업이 미뤄졌다.

별다른 진전이 없던 ILO 핵심협약 비준은 2010년 유럽연합(EU)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해 급물살을 탔다. 당시 한국은 한·EU FTA 체결 조건으로 2019년 4월까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완료하기로 약속했지만 기한을 지키지 못했고 이를 문제 삼은 EU가 한국을 상대로 무역 분쟁절차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디자인=김영찬 기자
ILO 비준 문제가 EU와의 무역 분쟁으로 비화될 우려가 커지자 정부는 비준과 법개정을 동시 추진하기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서두르고 있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한차례 비준을 시도했지만 여야 간 대립국면에 휩쓸려 무산됐다. 반면 21대 국회는 정부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176석의 압도적인 의석을 석권한 만큼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 정부의 비준안 추진에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부가 제출한 비준안은 국가보안법과 상충우려가 있는 105호를 제외한 결사의 자유 관련 협약(87호·98호)과 강제 노동 관련 협약(29호) 등 3건이다. 제87호는 노사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단체 설립 및 가입, 활동 등을 보장하며 제98호는 노사의 자유로운 교섭 보장과 노조 활동에 대한 불이익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29호는 모든 형태의 강제노동을 금지한다.

정부는 이들 3개 협약 비준에 필요한 노조법, 공무원노조법, 교원노조법 등의 개정안도 이미 국회로 넘긴 상태다. 해당 개정안에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 종사하는 근로자 외에 해고자·실업자 등의 노동조합 가입 허용, 노조전임자 급여지급 금지 규정 삭제 및 현행 노조전임자 제도의 근로시간면제제도 편입·통합 등이 담겼다.

재계, 경영권 보장 촉구
재계는 강력히 반발한다. 이 같은 개정안이 그대로 통과될 경우 노조의 결집력과 규모가 현재보다 커져 노사관계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정당하게 해고된 자, 퇴직자, 실업자, 사회적 활동가 등 기업과 무관한 자의 노조가입이 가능하고 이들이 노조 내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해당 기업에 무리한 이슈를 가중시킬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총에 따르면 한국은 대립적 노사관계와 경직된 노동시장 구조에 갇혀있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발표한 한국의 노사협력 순위는 2019년 기준 141개국 중 130위로 최하위 수준이며 노동시장 유연성 경쟁력은 141개국 중 97위로 중하위권에 속한다.

노사 협상 과정에서 노조의 파업으로 인한 손실도 높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0년 이후 2017년까지 한국의 임금근로자 1000명당 근로손실일수는 평균 43.13일로 미국 5.20일, 영국 18.06일, 일본 0.23일 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처럼 노사관계가 대립적인 상황에서 노조의 단결권만 강화되면 기업의 경영권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게 재계의 우려다.

/디자인=김영찬 기자
특히 형사처벌 문제로까지 이어질 경우 소송과정에서 부담하는 인적·물적 손실, 기업 이미지 훼손 등으로 인해 부당노동행위와 관련된 분쟁에 큰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국경제연구원 관계자는 “한국은 부당노동행위를 규제하는 동시에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 등 형사처벌까지 하고 있다”며 “선진국에 비해 과도한 측면이 있어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을 폐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계는 해고자·실업자 등에 대한 단결권 보장이 필요하다면 기울어진 노사지형을 평평하게 균형화할 수 있도록 사용자 측에도 대항권을 반드시 함께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재계의 요구안은 ▲대체근로 허용 ▲부당노동행위제도 개선 ▲사업장 내 쟁의행위 금지 ▲쟁의행위 찬반투표절차 보완 ▲파견 허용업종 확대 ▲임금체계 개편 등이다.

경총 관계자는 “정부가 단결권 보장만을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약한 사용자의 대항권 부분은 왜 도외시하는지, 대립적·투쟁적 노사관계와 고임금·저생산성 경제체질 문제를 왜 개선하지 않는지 경영계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며 “국회 논의 과정에서 경영계의 입장과 우려도 충분히 수렴·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