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이호승 기자,유경선 기자,정윤미 기자 = 27일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30억달러 규모의 대북 지원을 약속한 '비밀 합의서' 진위 여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야당은 당시 김대중정부가 북한과의 이면 계약을 한 증거라며 박 후보자의 서명이 담긴 해당 합의서 사본을 공개했고, 박 후보자는 "조작된 것"이라며 비밀 합의서를 강력 부인했다.
미래통합당은 이날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열린 박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하는 내용의 '남북 합의서' 한 장과 별도의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 한 장을 공개했다.
'남북 합의서'는 2000년 4월 8일 중국 베이징에서 비밀리에 회동한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북한의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같은 해 6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한 뒤 작성한 문서다. 합의 후 이틀 후인 2000년 4월 10일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발표한 것으로,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당시 대북 특사로 남북정상회담을 비밀리에 조율한 박 후보자는 중국을 여러 차례 오가며 송 부위원장과 접촉한 끝에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이어지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밑그림을 그렸다.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가 이날 오전 청문회에서 2000년 당시의 이른바 '대북송금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박 후보자를 상대로 "5억달러를 북한에 보내는 약속에 관여를 안했느냐"고 물으면서 '남북 합의서'를 보여주자, 박 후보자가 "5억달러가 여기에 어디 있느냐. 공개하려면 똑똑히 하라"고 따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문제는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라는 제목의 나머지 문건이다. 주 원내대표가 공개한 이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남과 북은 민족의 화해와 협력, 민족공동의 번영 및 인도주의 문제 해결에 이바지할 의지를 담아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첫째, 남측은 민족적 협력과 상부상조의 정신에 입각하여 북측에 2000년 6월부터 3년동안 25억달라(달러) 규모의 투자 및 경제협력차관을 사회간접부문에 제공한다.
둘째, 남측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5억달라(달러)분을 제공한다.
셋째, 이와 관련한 실무적 문제들은 차후 협의하기로 하였다."
서명은 Δ상부의 뜻을 받들어 남측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 Δ상부의 뜻을 받들어 북측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송호경이다. '남북 합의서'와 서명 양식이 같다. 날짜 역시 2000년 4월 8일로 '남북 합의서'와 같은 날이다.
대북송금사건 특검 수사 결과에 따르면 정상회담 성사와 현대의 대북사업 대가로 현대그룹이 5억달러(4억5000만달러+현물 5000만달러)를 북한에 보냈으며, 이 과정에서 정부가 현대그룹의 대출이나 국정원 계좌를 통한 송금을 도운 것으로 돼 있다.
이 '비밀 합의서'가 사실이라면 당시의 5억달러가 문서 속 '5억달러분'와 같은 의미일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문서가 사실일 경우 이는 현대그룹이 북한에 돈을 송금했고, 정부는 이를 도왔던 것이라는 수사 결과와는 달리 정부가 북한에 돈을 송금한 주체가 되는 것일 뿐더러 제공 액수 자체도 25억달러가 추가돼 총 30억달러에 이르게 된다.
이에 주 원내대표는 박 후보자에게 서명 및 문서 진위 여부를 캐물었다.
―주호영 : 사인도 똑같다. 이런 문건 사인한 적 있습니까?
▶박지원 : 그러한 것은…없는데요?
―아주 중요합니다.
▶예, 그런 것은 제가 한 거 없습니다.
―없습니까?
▶예.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후보자가 하셨던 말은 다 틀린 말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닙니까?
▶네.
―그래서 이후 시간에는 제가 5억달러분이 어떻게 갔는지는 지금까지 다 나와있어요. 현대가 4.5억불 가고, 그중 대한민국 정부는 한푼도 준 게 없다는데 판결문에 의하면 1억불은 정부 돈이 나간 거고 나머지 5000만불은 어떻게 해서 5억불이 맞춰진 걸로 나오는데 그렇다면 25억불이 갔는지 안 갔는지도 따져 물어볼 텐데. 다시 한번 묻습니다.
▶그런 적은 없습니다.
―한번 보여주세요. 이거 가져가서 본인 사인 맞는지.
▶(문건을 보고) 전 기억이 없습니다.
―이런 중요한 일이 기억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저는 저러한 건 없습니다. 우리가 경제협력 부분에 대해서는 강조를 했습니다.
―선서하셨고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 서명하셨고 양식도 똑같습니다. 이런 중요한 대북특사로 가셨다는데 이런 중요한 문건에 사인한 적 있는지 없는지 기억안나는 게 말이 됩니까.
▶저는 그렇게 사인한 적 없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없어요?
▶예.
―이 문건이 위조입니까?
▶제가 말을 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기억이 안나는 겁니까. 하신 적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습니까?
▶예.
―이 문건의 존재가…된다면.
▶글쎄요, 어떤 경로로 주 원내대표께서 입수했는지 모르나 4.8합의서는 지금까지 공개됐고, 다른 문건에 대해서는 저는 기억도 없고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오후 들어 속개된 청문회에서도 야당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하태경 통합당 의원은 박 후보자의 합의서 서명의 진위를 가리겠다며 박 후보자의 서명이 담긴 다른 서류 5~6개를 제시했다.
하 의원은 "다르게 보이는 서명이 있는가. 이것을(서명의 사실 여부를) 북한에 물어봐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서명한 적 없다", "기억이 없다"던 박 후보자는 오후에는 '위조된 서명'이라는 주장을 폈다.
박 후보자는 "저를 모함하기 위해 (제 서명을 누군가) 위조했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정부를 모함하기 위해서"라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북송금 특검에서 덮어둘 리도 없고, 국정원 간부를 통해 확인해 보니 (합의서는) 처음이라고 한다"고 반박했다.
박 후보자는 "사본을 주면 제가 경찰 혹은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겠다"면서 "모든 사람의 명예가 걸려 있는 문제"라고 물러서지 않았다.
주 원내대표도 오후 추가 질의에서 합의서의 진위 문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주 원내대표가 "조작된 것 같은가, (확실히) 조작이냐"고 묻자 박 후보자는 "조작됐다고 본다"며 "내 서명 날인은 맞고, 원본을 가져오면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또 "원본이 있다든지 서류에 서명한 게 사실로 드러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어떠한 책임도 다 감수하겠다"고 했고 "(후보 사퇴를 포함한)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도 덧붙였다.
주 원내대표는 "(합의서가 사실이라면) 30억불을 제공한 엄청난 것"이라며 "그러면 국정원장 후보를 사퇴해야 한다"고 재차 다짐을 받았다.
이에 대해 박 후보자는 "내 인생과 모든 것을 걸겠다"며 "사본이라도 줄 수 있느냐"고 진위 여부를 직접 확인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박 후보자는 과거에 특검 등의 수사를 통해 이미 검증을 받은 점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그는 "제가 2003년 대북송금 특검을 받았다. 특검이나 안대희 중수부장이 이 잡듯이 다 잡았다. 우리 가족 모두의 계좌를 추적하고 어려움을 당했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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