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한유주 기자 = '070으로 시작되는 인터넷 전화와 국제전화 번호는 일단 피하고 본다'. 보이스피싱 범죄를 피하기 위해 널리 알려진 방법이다.
중국에 사는 임모씨는 해외 곳곳에 흩어져 있는 보이스피싱 조직원들과 새로운 수법을 고안해냈다. 해외에서 전화를 걸어도 피해자의 휴대폰에는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나타나게 하는 변조 기기, 일명 '볼프 게이트웨이'를 사들인 것.
한국에도 기지가 필요했던 임씨는 20년 이상 알고 지낸 박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제주 서귀포에 있는 옥탑방에 기계를 설치해주면 대가를 지불할게."
제안을 받아들인 박씨는 서둘러 제주도에 월세 35만원짜리 옥탑방을 구했다. 얼마 후인 2019년 10월부터 올 5월까지 볼프 게이트웨이 기계 4대를 전달받아 차례로 설치했다.
조직원들은 박씨가 설치한 기계를 이용해 사기 행각을 이어나갔다. 피해자들은 010으로 시작되는 번호에 의심 없이 '수신'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기존 대출금을 상환하라. 그렇지 않고 다른 은행에서 대출하면 집이 압류될 수 있다." 은행 직원이란 사람의 독촉에 피해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한 피해자는 전화를 받고 바로 은행으로 달려 나가 현금 1000여만원을 전달하는 피해를 봤다.
신고를 받고 수사에 나선 경찰은 올 5월경, 제주 서귀포시의 한 옥탑방에서 수상한 기기 3대를 찾아냈다. 방 한 칸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크기에, 뾰족한 안테나 10여개가 솟아있는 모양이었다. 누가 봐도 일반적인 인터넷 공유기나 TV수신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경찰은 임차인인 박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박씨는 "중국인 종업원들이 숙소로 이용하는 곳인데 그 사람들이 설치한 것"이라며 발뺌했다. 예상외로 다음날 바로 종업원의 신원이 파악됐다.
박씨는 바로 경찰에 "내가 기기를 설치한 것은 맞는데 억울하다"며 자수를 했다. 그는 사기와 전기통신사업법위반 혐의가 적용돼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에서 박씨는 "조만간 제주도로 들어갈 테니 방을 잡아, 내가 보낸 장치에 인터넷을 연결해달라"는 임씨의 부탁을 받고 아무 의심 없이 설치한 것이라며 내내 혐의를 부인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씨가 경찰 조사 때만 해도 "중국에 있는 임씨가 한국 방송을 시청하기 위한 위성안테나를 설치해달라해서 설치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 문제였다. 재판부는 박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임씨가 국내에 들어와 사용할 인터넷을 연결해줬다'는 법정 진술을 믿는다 해도 의심쩍은 부분이 남았다. 박씨는 임씨에게 더 많은 대가를 요구하는 연락을 거듭하면서도, 국내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전혀 묻지 않았다.
결국 서울서부지법은 지난 9일 임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박씨가 임씨의 말을 믿었을 뿐 범죄에 가담할 의식은 없었다며 범행 전체를 부인하고 있지만 그의 주장은 상식에 크게 어긋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이스피싱 범죄가 갖는 사회적 해악과, 점점 더 진화해 이 사건처럼 발신번호 변작 등을 통해 피해자를 재생산하는 교묘한 방식 등을 보면 결코 가벼운 형을 선택하기 어렵다"며 양형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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