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 나는 지난주 TV에서 한 영혼의 살아있는 눈빛을 봤다.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결의, 희망 그리고 친절로 가득한 시선이었다. 나는 그런 눈빛을 사람이 아닌 개에서 본 적이 있다. 내가 작년 12월에 구조한, 지금은 입양을 가 행복하게 사는 '베티'라는 개의 눈에서다.
베티는 일생을 묶여 학대를 당했지만, 지금은 운명적인 견주를 만나 살고 있다. 베티는 어느 순간에 봐도 자세가 완벽하다. 늘씬한 다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상대방의 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정하게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다.
그런 눈빛을 가진 사람은 가수 나훈아였다. 그는 한 방송에서 지난 9월30일 밤, 코로나19로 심신이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는 비대면 콘서트를 열었다. 그는 15년 만에 방송에 출연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갈고닦은 예술의 경지를 보여줬다. 신은 그에게 '가수'라는 운명적인 임무를 줘 이 세상에 보냈다. 그는 그 구별된 임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54년간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른 베테랑이었지만, 프로답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프로'는 자신이 올라선 무대를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마치 단두대에 올라선 사형수처럼 임한다. '아마추어'(amateur)라는 말의 어원은 '진실로 그 대상의 결과에 상관없이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프로'인 척하는 '아마추어'는 어제의 자신을 반복한다. 자신에게 감동적인 노래가 아니라, 관객이 좋아할 만한 노래를 부르면서 아첨한다. 그런 사람은 구태의연한 어제를 반복하기에 급급하다.
나훈아는 이 무대를 준비하는 동료들에게 "연습만이 살길이다"라고 말하면서 독려한다. '연습'은 실전일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을 연극무대에 비유해 '시학'이라는 책에서 인간문화의 정수를 글로 남겼다. 그는 그리스 비극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극(悲劇)은 연습(演習)에 대한 재현(再現)이다.
그것은 심각(深刻)하고,
목적과 수단이 합일(合一)하고
또한 압도(壓倒)적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란 무대에 오른 배우다. 배우는 가장 먼저, 자신에게 맡겨진 유일무이한 배역을 알아야 한다. 그 배역을 모른다면, 인생이 낭패다. 우리는 흔히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 나의 배역이라고 착각한다. 배역은, 자신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거룩한 임무다.
나훈아는 말한다.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왕이나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대통령이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상인, 어떤 사람은 운동선수, 어떤 사람은 예능인, 어떤 사람은 위정자라는 배역을 맡는다. 각자가 맡는 배역에 몰입하는 것이 행복이고 권력이다.
자신이 맡은 배역을 훌륭하게 완수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나훈아가 삶의 모토로 삼은 '연습'이다. 배우는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그 역할을 완벽하게 실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해야 한다. '대통령'의 배역을 맡은 자가 권력만을 유지하기 위해 비굴하게 연기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그를 믿고 따른 국민에게도 불행이다. 국가라는 연극무대 전체가 실패로 끝날 것이다. 자신의 역할을 모르고 연기하는 배우처럼 안쓰러운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이 그 역할에 몰입할 리가 없고, 몰입이 가져다주는 신명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자신이 해야 할 유일무이한 배역을 아는 사람은, 그것이 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연습'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프락시스'(praxis)라는 단어를 우리는 '연습'으로 번역했다. 프락시스는 처음과 마지막, 원인과 결과를 하나로 만드는 예술이다. 배우에게 연습이란 실전이며,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그것을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온전하게 쏟는 초인적인 수고다. 연습이란 저 하늘에 높이 떠 있는 별을 따서 자신의 가슴에 심는 용기이며 정성이다. 인생은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을 빛나게 만드는 무대다.
나훈아는 자신의 역할을 잘 모르는 한 방송국을 "모르긴 몰라도, 거듭날 겁니다"라는 말로 넌지시 나무라고 격려한다. 인간은 부모를 통해 동물로 태어나고, 인생이란 무대에서 자신의 배역을 발견하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거듭난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은 '자유(自由)롭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말미암는 이유는 자신에게서 찾는다.
만일 누가 그의 자유를 침범한다면, 그 대상이 최고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의 명령이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할 것이다. '자유'는 외부의 구속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닮고 싶은 별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나훈아의 연기는, 가수라는 직업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해 저 하늘의 별이 얼마나 빛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줬다.
나훈아의 공연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비극의 특징 세 가지를 모두 가졌다. 첫째 '심각'(深刻)하다. 심각이란 자기 자신을 위해 한없이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진행하는 헌신적 노력이다. 심각이란 어두운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10년 후 나 자신에게 감동적인 나를 위해, 저 하늘의 별을 가슴 깊이 '깊이 새기는' 각고의 노력이다. 나훈아의 연기는 온갖 하찮은 웃음거리가 난무하는 대한민국에서 정색을 알려줬다.
둘째 '목적과 수단이 하나'다. 오늘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내가 지금 하는 언행이 나의 유언이다. 그런 사람은 자유롭고 카리스마가 넘친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김동건 아나운서로부터 언제까지 가수활동을 하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훈아의 대답을 허를 찌른다. "이제는 내려올 시간이라 생각하고, 그게 길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종말론적으로 살고 있다.
셋째 '압도(壓度)적'이다. 압도적인 사람은 두려운 것이 없다. 두려운 것이 있다면, 자신이 최선을 경주하지 않아 이루지 못할 자신에 대한 후회뿐이다. 압도적인 사람은 '나는 나'인 사람이다. '나는 나'인 사람은 자신이 맡는 배역인 '나'를 위해 오늘을 헌신하는 사람이다.
나훈아가 나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두고볼 만합니까?" "당신은 다른 인간으로 거듭날 것입니까?" "당신은 지금 하는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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