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출의 꽃” 석유제품은 한때 반도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2011년 반도체와 자동차 등 전통 수출 강자를 제치고 2년 연속 수출 1위에 올랐다. 2013년 반도체에 다시 1위 자리를 내줬지만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비산유국’에서 거둔 대단한 성과라는 평가가 자자했다. 지난해 석유 제품 수출액은 406억4800만달러. 전체 수출에서 7.5%를 차지하면서 여전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 수출 효자 노릇을 하던 석유제품은 국내 정유사의 주 수익원이기도하다. 잘나가던 시절엔 수조원대 영업이익을 달성하면서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일반 배당에 특별 배당까지 더해가며 배당잔치를 벌이던 해도 있었다. 최근 정유사의 상황은 그때와는 180도 다르다. 석유 소비 급감에 이어 수출 전선까지 출렁이면서 경영난이 가중되고 있어서다. 팔면 팔수록 손실. 취약한 수익구조는 더 큰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원유로 가득 찬 탱크 모습/사진=뉴스1 정유업계가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외부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정유업 특성상 어려웠던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라지만 이번 위기의식은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소비가 멈춰버린 항공유와 휘발유·경유 등 매출이 급감한 것도 모자라 재고 부담까지 떠안은 상황. 들어갈 돈은 많은데 현금흐름은 꽉 막히면서 자칫 유동성 위기에 몰릴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정유업엔 이제 ‘좌초 산업’이라는 꼬리표가 붙고 있다. 여기에 내년 전망까지 어두운 상황. 정유사의 한숨은 더 깊어지고 있다. 정유사 한 관계자는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며 “그동안 키워온 덩치로 버티고 있는 것일 뿐 올해 정유사가 몇 차례 부도가 났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털어놨다.
━
국제유가 변화 따라… 마진율 ‘널뛰기’
━
불과 몇 년 전까지 호황을 누렸던 정유업계가 왜 이렇게 됐을까. 업계에선 정유사의 위기를 ‘저성장 저수익 구조’에서 찾는다. 일반 제조업의 논리로 따질 수 없는 정유업의 특성이다.
우선 정유업은 국내 산업 가운데 변동성이 큰 국제유가와 연관성이 가장 높다. 원유를 전량 수입한 후 국내 정제시설을 거쳐 휘발유와 경유 등 석유제품으로 생산해 판매하기 때문.
정유사가 산유국 현지에서 원유를 구매해 국내로 오기까지 통상 2주 이상이 걸린다. 만약 국제유가가 요동치는 시점이라면 이 기간 결제 시점에 따라 이익도 널뛸 수 있다는 얘기다. 비쌀 때 사서 저렴한 시기에 팔아야 한다면 그 손해는 정유사의 막대한 손실로 잡힌다. 반대로 저렴하게 사서 비싼 시기에 판다면 이익이 되는 장사를 한 셈이다.
/그래픽=김영찬 기자 국제유가 시장 동향을 파악하고 가격과 재고 수요를 예측해야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국제유가엔 일반적인 수요·공급 외에도 산유국의 정치적 상황이나 강대국 간 무역 분쟁 등 다양한 요인이 반영돼서다. 유가는 또 ‘정제 마진’을 결정한다. 정제 마진은 정유업계의 수익을 가늠하는 핵심 지표로 휘발유와 경유 등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과 수송·운영비 등 비용을 뺀 값이다. 올해 이 정제 마진이 내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8월 둘째 주부터 플러스로 돌아섰으나 미미한 수준. 지난 12월 첫째주 역시 0.6달러에 불과했고 둘째 주 역시 0%대다. 업계는 정제 마진 손익분기점을 배럴당 4~5달러 선으로 보고 있다. 그 밑으로는 팔아도 손해다.
그래픽=김영찬 기자 유류세도 발목을 잡는다. 휘발유의 리터당
판매가가 1400원이라 가정했을 때 ▲교통·에너지·환경세 ▲주행세 ▲개별소비세 등 세금이 885원가량을 차지한다. 공장도 가격을 더하면 정유사가 휘발유를 공짜로 판다고 해도 소비자가 내야 할 돈이 약 1200원이다. “유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기름값이 왜 떨어지지 않느냐”는 소비자의 불만은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 있다는 게 정유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비산유국인데도 OECD국가 중 유일하게 연간 1조원에 웃도는 원유 수입 관세도 내고 있다”며 “팔기도 전에 세금부터 내야 하는 상황이라 업황이 안 좋을 때는 막대한 부담으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
비정유로 수익 방어했지만… 전망 어두워
━
정유업계의 분위기는 전적으로 외부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인 만큼 운신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정유사도 제품과 설비의 고부가가치화 등 비정유 부분을 늘리는 쪽으로 수익 방어에 힘써왔다. 전문가들 역시 얼마나 원료 낭비를 줄이고 다양한 소재를 고효율로 생산해 낼 수 있는지를 정유사의 미래를 좌우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정유사의 사업 분야는 ▲원유 정제로 생산되는 휘발유와 경유 등을 판매하는 정유 부문 ▲원유를 정제할 때 나오는 나프타를 분해해 파라자일렌(PX)과 벤젠·톨루엔·혼합자일렌 등 방향족 제품을 만드는 석유화학 부문 ▲찌꺼기인 잔사유를 재처리해 만드는 윤활유 부문으로 나뉜다.
주유소 전경,/사진=뉴스1 표면적으로 가장 돈이 되는 것은 정유 부문이지만 수익 구조상 다른 부문 영업이익률이 정유 부문을 넘어선 지는 오래다. 석유제품 시장의 수출·입이 자유롭고 관세장벽도 없다는 게 큰 경쟁력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윤활유 부문은 중국·인도·남미를 비롯한 신흥국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30%가 넘는 영업이익률을 가져오기도 했다. 정유사는 앞다퉈 석유화학·윤활유 사업 투자를 늘려왔다.
문제는 이 호황 역시 머지않아 끝날 것이라는 ‘비관론’이다. 전문가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드는 석유화학 제품 수출액이 정유사의 수출형 비즈니스가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 주요 수출국이었던 중동과 인도 지역은 몇 년 전부터 수출형 정제설비 증설을 늘려왔다. 중국도 자국의 정유·화학산업 육성 정책에 힘입어 신규 설비를 지었다.
내년 하반기 이들을 중심으로 200만 배럴 규모의 신규 정제 설비 가동이 예상되고 있다. 국내 정유사의 수출 시장은 더 좁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제 설비 신·증설과 더불어 유럽 중심의 탄소 배출권 규제 강화도 정제 설비 가동에 부정적 요소가 될 전망이다.
노우호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정유사가 코로나19 이후 중장기적 관점에서 정유 설비 간 통·폐합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노 연구원은 “원유 평균 수요는 2023~2025년 110만배럴을 정점으로 그 이후 50만 배럴까지 하락할 전망”이라며 “2022년 이후 글로벌 정제 설비 가동률 하락은 불가피하고 수요 증가량을 압도하는 공급 증가량으로 기존 설비가 통·폐합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