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4일 책 정리에 몰두했는데 옛 책들을 뒤적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예를 들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뒤표지에 찍힌 값이 5000원. 지금 매겨진 가격의 절반 수준이다. '범우사'에서 나온 '서울대 선정 고전 200선' 중 하나로 1972년 초판 1쇄 이후 1997년 3판 1쇄 발행본이다. 이 책을 샀을 당시 나는 고교생이었다. 맨 뒷장에 부산의 대형서점인 '영광도서' 딱지가 아직도 붙어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기 전까지는 고향인 부산에서 살았다. 영광도서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검색했다.
"우와. 서점 딱지에 나와 있는 대표전화 번호가 여전히 그대로네?" 1968년 창업 이후 국내 대형서점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단다. 고교 시절 나는 주요 고전에 속하는 '유토피아'에 관한 대목을 어느 참고서에서 읽었을 것이고, 책을 사고서도 읽기를 미룬 채 수능을 봤고,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면서 '고전이니까 한번은 읽어봐야지'라는 심산으로 택배로 받을 짐 속에 넣었던 책이었다. 민망하게도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내내 읽지 않았다. 우연히 들춰본 차에 이제야 읽는다. 황금을 돌처럼 느낄 만큼 모두가 모든 것을 공유하고, 같은 일을 하고, 똑같이 먹고 입는다는 공상 사회 '유토피아'(Utopia). 21세기엔 아무래도 허망한 화두다.
같은 책이 출판사나 표지를 바꿔 입고 나온 걸 볼 때면 나의 오래된 책이 정말 보물이 된 것만 같다. 곁에 두는 책과는 인연이 시작된다. 이미 읽었든 아직 읽지 않았든 설령 영영 못 읽더라도 말이다. 세상에 이런 책이 있다는 걸 아는 것과 모르는 건 같지 않다. 낭만적인 만큼 허무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책의 존재를 아는 건 그 자체로 힘이 된다. 필요해지거나 여유가 생기면 금방 찾아갈 수 있는 피난처나 안식처를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책과의 인연은 물리적 시간보다는 '필요'나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당장 필요하지 않거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사두고도 못 읽는 책이 많다는 변명을 하고 싶은가 보다. 하지만 당장 필요하지 않거나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꼭 잊어버리는 건 아니다. 책과의 인연 또한 다음과 비슷할 것이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 중에서)
조민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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